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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가 있는 얼굴

(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by 강 라헬

서사가 있는 얼굴

나는 표정을 숨기는데 서툴다.

친할머니는 늘 “왜 저*은 얼굴에 암상이 가득한지 모르겠네, ㅉㅉ.” 하시며 눈을 흘기셨다. 그랬다, 나는 잘 웃지도 않았고 재잘재잘 수다스럽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부족할 것 없는 집 팔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를 부러워했지만 사실 무늬만 아무개 막내딸인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 힘에 부쳤다.


노령의 몸에 나를 담은 엄마는 부끄럽고 남사스러워 남편에게 조차 임신을 숨겼다. 해서, 엄마는 나를 버리려고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들을 자행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간장도 마시고, 언덕에서 구르기를 했음에도 여전히 뱃속에 온 힘을 다해 붙어있는 나를 데리고 조산원에 갔다. 하지만 산모의 목숨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원장 말에 당신이 죽을까 봐 그대로 담고 돌아왔다는 나의 탄생 비화를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주셨다. 그것도 ‘깔깔’ 웃으시면서.


어쨌든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하게 열 달을 지내고 추석 즈음에 세상에 나온 나. 장사를 크게 하셨던 친가는 추석 대목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나는 젓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미음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고 한다. 지금의 식탐도 아마 그때 못 먹은 것이 한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보면.


형제들과 터울이 많이 나는 나.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위로 두 분이 세상을 뜨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첫째 언니와는 거의 30년 차이가 나니까. 바쁘신 부모님 대신 대학생이던 오빠와 언니가 나를 돌보아 주었다. 허나 그것은 돌봄이 아니고 구속과 학대였다. 막내의 버릇이 없어지면 안 된다는 명목을 앞세운 그들은 꽃 회초리를 들고 지옥을 보여주었다. 말대꾸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우는 것조차 허용치 않은 그들은 온화한 얼굴의 너울을 쓴 마귀집단이었다.


변명을 하고 싶을 때나 울고 싶을 때도 가위를 손에 든 그들의 “뚜욱~뚝” 소리에 기가 막히고 두려워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눈을 감았다. 어린 가슴이 얼마나 아팠고 애가 닳았을까. 언제나 단정한 자세와 옷차림으로 행동해야 했고 얼굴에 미소를 지어야만 했으니. 부모님은 만족해하셨고 그들은 그만큼의 상을 받았다. 혼자일 때 볼 부은 얼굴과 찢어진 눈매는 어쩔 수 없는 일그러진 나의 자화상일 테다.


누군가는 말한다. 얼굴은 곧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라고. 70이 넘은 지금,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아니, 자신이 없다고 해야 할지도. 내가 복스럽고 편안한 얼굴은 아니니까. 허나, 그리 자랑할 것도 내세울만한 것도 없는 삶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내 얼굴에 그 시간들이 담겨있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내 얼굴에는 풍부한 감정과 이야기가 담겨있는 매력적인 나만의 서사가 있음이 확실하다고 믿으니까.


나는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몸은 학대로 쇠하여 여기저기 고장이 났고 그 결과 얼굴은 일그러진 양반탈의 모습인 것을 어쩌랴. 조카딸의 말이 생각난다.”이모는 좋고 싫음이 어떻게 그렇게 얼굴에 금방 나타나”라는. 해서 지금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언짢은 티를 내지 않는 내공, 그리고 미소 담뿍 담은 표정을 연습해야겠다.


그렇게 연습과 노력을 하면 내가 봐도, 남들이 봐도 평안한 얼굴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표정을 숨길 줄 아는 사람들은 인정을 받고 때로는 동정도 얻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기에 애먼 소리를 들을 때도 많아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나인 것을. 내가 좋아하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소리 없이 외치며 나를 변명한다. 어쨌든 내 얼굴엔 남들에게 없는 나만의 서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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