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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경노 Feb 24. 2022

육아 인수인계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다.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 나는 시골 출신 7년 차 직장인이었다. 친정도 시댁도 300km 떨어져 있었고 주변엔 지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이외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 고민을 길게 한 것 치고, 눈물겨운 10달 내내 입덧 지옥에서 산 것 치고… 예정일에 딱 맞춰 신랑이랑 둘이서 씩씩하게 출산을 했다. 나는 출산 휴가만 쓰고 회사에 복직을 해야만 했다. 4개월 동안 또 다른 임산부의 출산으로 인한 업무 공백을 메우러 내 뼈마디도 못 메운 채로 출근을 했다.

300km 떨어진 시골집에 아이는 맡겨져서 할머니가 엄마인 줄 알고 자랐다.

드디어, 4개월이 지나 육아휴직을 받아 시골로 내려갔다. 할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예민했던 아이를 이제 데려와야 했다.

할머니가 아니면 친모인 나의 목욕 시중도 불허하는 아이 때문에 앞이 캄캄했다.

엄마와 나는 상의 끝에 1달간 육아 인수인계 기간을 갖기로 했다.

말이 인수인계 기간이지, 엄마는 본인의 딸을 또 엄마로 키워야 하는 제2의 육아가 시작된 것이다.

 인수인계 기간 중반쯤 되던 어느 날, 내 엄마가 내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보다 문득 내게 붙여진 엄마라는 이름은 어쩐지 엄마가 물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유독 힘들게 했던 날은 이게 너 같은 거 낳아 보라고 했던 엄마의 복수인 건가 싶었고, 조리원에서 열심히 배웠는데도  덜덜 떨며 아이 첫 목욕을 시키는 서툰 내 손을 밀어내고 능숙하게 목욕시키던 야무진 엄마의 손을 봤던 날은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도 10살이나 어렸던 그 나이에 어떻게 엄마 노릇을 했던 건가 싶어 눈이 시큰거렸다.

그러면서도 양육 방식 때문에 종종 부딪히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끝내는 내 뜻을 따라주었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났고 나는 나를 친모로 인식했는지 아닌지 모를 아이를 데리고 호기롭게 친정을 나섰다.

 그날, 내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 딸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절대로 잊지 못할 말이었다.


 아이는 5살이 되었고, 그 사이 엄마는 아이가 갑자기 아프거나 하면 어김없이 300km를 옆 집처럼 오고 갔고 나 대신 내 아이의 입원실을 지켰다.

 내가 어느 날 엄마라고 부르는 걸 보고 아이가 “아니야, 엄마 아니야. 할머니야”라고 했던 날, 처음엔 아직은 그런 관계성을 몰라 저런 소리를 하는 아이가 너무 귀여웠다. 그런데 계속 엄마가 아니고 할머니라고 박박 우기는 아이에게 은근 부아가 치미는 나를 발견하고 깨달았다.

나한테 엄마라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 사람에게 엄마의 부재란 우주를 잃는 것과 같다는 것.

나는 그렇게 엄마로부터 엄마를 물려받아한 아이의 우주가 되었다.


가끔 너무 힘에 부치는 날, 아주 오랜 기억 속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엄마가 떠올랐다. 살면서 대차게 넘어지던 순간 순간,내가 위로 받고 싶기보다 그날의 엄마를 너무나 위로해주고 싶어질 때가 있었는데 엄마로부터 상처받았다고 생각했던 그날로 돌아가 용서까지는 아니어도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너무 어렸고, 육아서도 많지 않았고, 정보가 넘쳐 나는 세상도 아니었던, 뭘 잘 몰랐던 그 어린 엄마를 한 번쯤은 안아 주고 싶었다.

지금 엄마한테 말해도 좋지 않을까 했다가 말하지 않았다. 괜히 엄마의 아픈 기억일지도 모를 그날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시간이 많이 흘러 내 아이가 너무 힘에 부치는 날 문득 나를 떠올렸을 때 그 기억 속에 내가 너무 서툰 모습이 아니길, 좀 더 다듬어진 모습이길 다짐했다.


아이의 첫 파마를 했던 날

미용실에 차분하게 앉아서 내가 싸온 주먹밥을 야무지게 받아먹던 모습을 보고 손님으로 와 있었던 어느 아주머니가 그런 말을 했었다.

“아유~요즘 젊은 엄마들은 어쩜 저렇게 손도 야무지고 준비성도 철저해.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서 막 키웠어.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한테 너무 미안해.”

생각지도 않았던 칭찬에 잠시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가 그 아주머니에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다 한마디를 겨우 던졌다.

“아닐 거예요. 분명 그 시절, 그때 좋다고 들었던 것들 중에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주셨을 거예요.”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그 손님의 모습에서 풍족하지 않았던 그 시절 우리 엄마가 우리에게 입혔던 옷들, 먹였던 것들, 가르쳤던 것들이 떠올라서였다.

내 말에 아주머니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갑작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말씀하셨다.

“맞아! 진짜 그건 맞아!”


서로 선택하지 못하는 관계. 부모 자식과의 관계.

그래서 나에게 부족한 것만 보며 가슴속으로 은근히 원망을 했던 날들이 있었다.

내 부모가 나한테 이만큼 뒷바라지를 해줬다면 나는 절대로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착각하며 다른 집 부모들과 비교하며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셈 했던 날도 있었다.

일정 부분 사실일 수도 있을진 모르겠으나, 내 인생은 내가 잘 살기로 마음먹은 날로부터 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보다 좀 더 가진 사람보다 내가 훨씬 노력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그래도 부족했던 나의 부모를 탓하기보단 내가 좀 더 나은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생각은 바뀌었다.  불필요한 책망 같은걸 자연스럽게 의미가 없어졌다. 아이를 위한 대단한 희생을 다짐할 건 절대 아니다.

내가 나로서 행복할 수 있을 때 건강한 사랑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건 남녀 사이도, 부부 사이도,부모 자식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 스스로 온전할 때,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마음을 다루지 못해 쩔쩔 메던 내가 조금은 의연해지고,스스로 잘 서려고 노력할 때 신기하게도 현재 남편을 만났다.  

불완전한 사람의 마음이란 것에 믿음이라는 것을 선뜻 내어주고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게 했다.

그렇게 그 벽을 넘고,너무나 자연스럽게 엄마가 됐다.

처음엔 남편이 내가 엄마가 될 수 있는 용기를 줬다고만 생각했는데 조금 지나고 보니 그건 나에 대한 믿음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생각하지 않는 용기.

상대에 대한 기대나 믿음 보다 어떤 순간에도 끝내는 괜찮아질 나에 대해 믿음.

어른이 되고,사회인이 되고,아내가 되고,엄마가 되고 보니 그것은 어쩌면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낸 나의 엄마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내 엄마는 나를 위해 기꺼이 할머니가 되었으니,엄마가 내게 물려준 것만 같은 엄마라는 이름을   근사하게 만들어 봐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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