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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보이지 않는 적과 벌이는 한판승부

요즘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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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look.so/posts/q1tpwE1



- 글을 쓰게 된 목적 : 

alookso에서 에세이 쓰기 모임이 생긴 걸 핑계로, 한동안 쉬고있던 글쓰기를 다시금 시작해 본다. 나는 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던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잘 하지 않아도 괜찮은 뭔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매사에 잘해야만 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면, 너무 답답할 것 같다. 잘 하면 당연히 좋기야 하겠지만, 잘 하지 못 해도 괜찮은 것 하나쯤은, 실수해도 괜찮은 것 하나쯤은 있어야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글이란 취미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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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얼룩소에서 진행하는 [얼에모], 얼룩소 에세이 쓰기 모임에 참가하는 글입니다. 소재 다섯 개(글 - 일 - 돈 - 쉼 - 나)에 대해 한 달에 2회가량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합평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경어체를 사용하던 평소와 달리 부득이 평어체를 사용하게 됨을 양해 바랍니다.


=====


글쓰기란 보이지 않는 적과 벌이는 한판승부



0.

잘 하지 않더라도

좋아할 수 있다면


글, 이 글자를 보면, 여러 가지 감정과 기억이 뒤섞여 올라온다. 일단, 부정적인 감정부터. 어렸을 때, 글쓰기가 참 싫었다. 왜 싫었는지 말하라면 수백 가지도 이유를 들 수 있다. 받아쓰기 시험에서 맞춤법이 틀리면 안 되니까, 방학 때 쓰는 일기를 미뤘다가 몰아서 쓰려니 힘들어서, 어떻게 쓰는 게 잘 쓰는지 몰라서, 내가 쓴 글이 잘 썼는지 알 수 없어서, 잘 쓰면 뭐가 좋은지 몰라서 등등. 하지만 이 모든 이유 앞에는 딱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바로, '잘 쓰고 싶은데'.


잘 쓰고 싶은데, 받아쓰기 시험에서 맞춤법이 틀리면 안 되니까,

잘 쓰고 싶은데, 방학 때 쓰는 일기를 미뤘다가 몰아서 쓰려니 힘들어서,

잘 쓰고 싶은데,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잘 쓰고 싶은데, 내가 쓴 글이 잘 썼는지 알 수 없어서,

잘 쓰고 싶은데, 잘 쓰면 뭐가 좋은지 몰라서,


그러니까, 글을 잘 쓰기만 했다면 싫어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게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생각처럼 잘 안되니까 싫어했던 것. 글쓰기를 좋아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좋아하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전에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렸을 때 글쓰기에 남은 감정은 온통 부정적인 기억 투성.


그때의 나는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나이였다. 잘하면 칭찬받을 수 있고, 칭찬받으면 좋아했으니까. 잘 하지 않았더라도 좋아할 수 있다는 세계를 깨닫기엔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대학에 들어가서 만났던 한 사람 덕분에 나의 세계가 처음으로 깨졌다. 잘하지 않아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잘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글을 쓰는 데 훨씬 도움이 됐다. 좋아하지만 잘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있다는 것,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 아닐까.



1.

소재가 먼저냐

감정이 먼저냐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니, 글쓰기를 싫어했던 과거의 내가 가진 생채기는 어느 정도 아물어졌다. 상처를 극복하고 나니 문득, 글을 잘 쓰고 싶어졌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본질적인 질문 세 가지가 붙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 걸까?

나는 [왜] 잘 쓰고 싶은 걸까?


앞에 있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나만의 답을 내리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자기 생각을 온전하게 오해 없이 왜곡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것. 하지만 글로 생각을 온전하게 오해없이 왜곡없이 표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고차원의 생각을 1차원적인 글로 옮기는 순간, 이미 그 글은 왜곡된다. 왜곡을 없앨 순 없으니, 그저 최소화하려고 애쓸 따름.


글은 잘 쓰려고 노력하기보다, 못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게 좋다. 일단 뭐라도 써 놓고 나서 내가 하려는 말이 맞는지 비교하면서 확인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맞고 틀리고는 그다음 문제일 뿐, 나의 생각이 글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오해가 없도록 쓰는 게 우선이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화]가 나면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분노]와 [답답함]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글의 느낌이 확 달라진다. 그러니까 나는 좋은 글을 쓰려면, 내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무엇에 [답답함]을 느끼는지 생각하는 게 먼저다.


일단 화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진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해야 이 화가 풀릴 수 있을까를 쓴다. 그렇게 쓰다 보면 어느새 분량이 채워진다. 그렇게 나의 [분노]와 [답답함]을 글로 써 놓고 나면 화가 풀린다. 시간이 지나 화가 풀린 후, 마치 화가 안 난 것처럼 글을 다듬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랄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한 줄이어야 잘 쓴 글이다. 글쓰기 좋은 소재를 잘 발견하고, 내가 쓰는 모든 문장이 그 좋은 소재를 가리키고 있어야 잘 쓴 글이다. 이 말을 나에게 맞게 번역해본다면, 무엇이 나를 화나게 하는지, 무엇이 나를 답답하게 하는지를 잘 들여다보는 것이겠지.



2.

글쓰기란 보이지 않는

적과 벌이는 한판승부


이제 '나는 왜 잘 쓰고 싶은 걸까?'를 생각한다. 왜를 묻는 말은 지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들기에 꽤 중요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안에 남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나에게 글쓰기란 보이지 않는 적과의 승부나 대결로 받아들였던 것.


이 말을 좀 더 풀어보면, 내 깊은 마음속에 져도 괜찮다는 말은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싫었나 보다. 아무리 열심히 써 봤자 승부에 질 것 같으니,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한다. 부끄럽다.


한 번 더 질문을 던져 파고들어 본다. 잘 쓰면 뭐가 좋은지, 이기면 뭐가 좋았길래 이기고 싶었을지 생각해 본다. 나는 영향력을 탐했던 것 같다. 나에게 영향력이란 남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내 안에 남을 조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조종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는 조종받고 싶지 않으면서 남을 조종하고 싶어 하는 내로남불적인 이중성이 있었다. 부끄럽다.


두 번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서, 잠시 생각을 멈춘다. 그러니까 나는 지고 싶지 않아서 시작조차 하지 않았구나. 남에게 조종받기 싫으면서, 남을 조종하고 싶어서 글을 잘 쓰고 싶었던 것이구나. 이 말도 안 되는 유치함과 모순이 내 안에 있었구나. 아니, 바로 나였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 내가 써왔던 글을 돌아본다. 그동안 내가 써왔던 글은 꽤 방어적이었다. 빈틈없이 촘촘하게 짜인 글, 어떠한 반격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글. 그러니 글 하나를 쓰고 나면, 어느새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 아마 이런 글을 썼던 건 보이지 않는 적에게 조종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던 게 아닐까.


내 안에 있던 부끄러움을 몇 가지 발견했지만, 쓸 때마다 늘 지치곤 하지만, 매번 보이지 않는 적에게 지고야 말지만, 잘 쓰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금 쓴다. 글쓰기는 내면의 나를 발견하게 해주고, 나를 끊임없이 성장시키고, 또한 가끔은 행복하게 만들어주니. 이래서 내가 글을 못 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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