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a Sep 05. 2022

어린이해방군총사령관


 나는 공부를 꽤 잘하는 아이였다.--네. 자기 입으로...-- 학원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다들 선행학습을 한다기에 한 달 정도 다녔다. 사실 그건 학업에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같이 학교를 갈 친구들을 미리 사귀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로 이점이 없었다. 물론 매달 학원을 보낼 수 없던 넉넉하지 못한 경제사정도 한몫했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교과서만'을 보고도 충분히 수업을 따라갈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주변인들은 왜인지 엄마를 조금은 비난했다. 글을 떼기 전부터 책을 줄줄 외던 나를 두고, 애 머리가 좋은데 엄마가 뒷배가 되어주지 못해서 그 영재성을 키워주지 못한다고 하고는 했다. 실제로 몇몇은 애가 어릴 때부터 영어 영재원 같은 데에 보내기도 했고, 과목별로 운동별로 학원이니 과외도 시키는 것 같았다.

 엄마는 학교에 따로 찾아가지 않는 부류였는데, 엄마도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꼬맹이일 때, 반에서 부반장인가 직책을 맡아 엄마도 학부형 모임에 불려 갔다. 담임이라는 사람이 어른들에게 각각 반에서 쓸 쓰레기통, 빗자루 같은 기물을 사 오라고 했더란다. 엄마는 별 걸 다 사 오란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니하며 빗자루 당번을 맡았단다. 순진하게 진짜 빗자루만 사 가지고 간 엄마와 달리 다른 부모들은 눈치껏 봉투도 같이 쥐어주더란다. 그 순간까지도 아무것도 몰랐던 엄마는 하교한 내가 한 말을 듣고는 다시는 자녀의 학교에 발을 내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담임은 고작 9살인 자기 반 학생에게 "너네 엄마는 정말 빗자루만 사 왔구나?"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의 선택을 존중했다. 학교에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선생들에게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운동회며 졸업식이며 딸의 모든 행사에 참여했다. 다만, 선생들에게 주는 이른바 '촌지'가 흔했던 시절이다 보니 학교엔 우리 엄마가 계모라는 소문도 돌았다. 


 아무튼 나는 하교를 하면 학원에 가는 대신 엄마와 서점에서 산림욕을 했고, 금요일이면 내 하교를 기다린 엄마 아빠와 놀러 다니는 게 좋았다. 학교 외 공부도 나 스스로 필요하다 생각되면 말씀드리겠다 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염려와는 다르게 우리 모녀는 불만이 없었고, 휘둘리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던 것 같고, 나도 사실 좋은 머리와는 별개로 공부에 별 흥미가 없던 아이였던 것 같다. --사실 학교에서 배운 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제외하고는 쓸 일이 없기도 하지만, 머리 좋은 녀석의 단점이 벼락치기로 시험을 봐서 성적은 나쁘지 않지만, 장기기억은 하지 못한다는 것. 단기에 암기하는 것에만 강했던 걸로... 시험만 잘 봤던 걸로...-- 


 나는 대한민국의 흔한, 12년 개근상을 받은 학생이다. 성인이 된 뒤 가장 후회했던 것은 이 일이었다. 12년 동안 졸업이 가능한 일수 내에서는 부모님과 갑자기 여행도 가고, 드물게 아팠을 땐 결석도 하고, 친구들과 땡땡이치고 놀러도 가고. 추억할만한 일들을 학교 밖에서도 만들 수 있었을텐데. 미련하게 개근상을 받아야 성실한 아이일 줄 알았던 과거의 내가 답답하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최근 고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이 닿았다. 우리 고등학교에는 제2 외국어가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중 선택한 반에 배정되게 되어 있었다. 나는 특이한 과목을 원해서 스페인어를 선택했고, 문과 스페인어는 학년에 한 반뿐이었다. 덕분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친구들과 3학년까지 함께 하게 되었고, 그 때문인지 그때는 우리 나름의 끈끈함이 생겼던 것 같다.--스페인어는 Hola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 단기 기억 능력자..--

 아무튼 이렇게 끈끈한 친구들과도 각자 삶을 살고, 나이를 먹고 더러는 결혼을 하고, 몇몇은 아기 엄마 아빠가 되었다. 20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서른아홉 명의 앳되던 친구들은 전 세계 방방곡곡 퍼져있었다. 독일에, 캐나다에, 일본에, 나는 호주에. 미혼인 친구들도 꽤 있지만 가끔 육아와 양육에 대한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나처럼 돌 미만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도 많지만 더러는 십 대 자녀를 둔 친구들도 있기에 가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토픽도 튀어나온다. 아이들끼리 불주사 흉터 유무를 가지고 서로 거지라고 놀린더라는 얘기도 들렸다. 이사를 고민 중인 친구는 근처 학교에 치맛바람 일으키는 학부모가 많지는 않은지 맘 카페부터 잠입해봐야 한다고도 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는 가난하니 같이 놀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해묵었다. 한편으로는 호주 시골에서 자유롭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호주도 대도시와 같이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고, 상대적으로 사립인 교육기관이 많아 더 힘든 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라 치부할 일은 아닙니다.-- 다들 좋은 학교엘, 수준이 높은 교육을 가르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뭐가 더 중요한지는 잊은 듯도 하다. 우리 아빠는 내게 늘 인간이 먼저 되라고 가르쳤는데.. 



 최근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한편으론 잡음이 있던 드라마다. 우영우라는 독특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장애라는 소재를 소비한 것부터가 이미 논란거리다. 그러거나 말거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영우 특유의 맑음과, 그걸 또 찰떡같이 표현해 낸 배우가 사랑스러워 행복하게 지켜봤다. 나름 매회 에피소드에 따분할 수도 있는 법적인 지식을 녹여낸 것에 대한 노고도 높이 산다.--일부 회차는 실존하지 않는, 만들어 낸 법률도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차 중에는 학원 원장의 아들이 아이들의 자유를 주장하며, 학원 버스를 탈환, 아이들을 나들이에 데려가는 바람에 납치 명목으로 재판을 받게 된 내용이 있다. 이 학원은 평소 수업시간 내내 문을 잠가두는 등, 고작 10세 이하 아이들에게는 가혹한 규칙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주인공이 본인을 어린이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지칭하고, 자신만의 캐치프라이즈를 갖고,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이름으로 개명까지 했던 것. 그리고 얽매여 살아온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위로하며 아이들에게도 자유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잠시 준 것이다. 억지스러운 연출을 무시할 수만은 없지만 나는 가상인 이 사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영특한 모습을 보인다면, 욕심 내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가끔 나는 스스로 묻곤 한다. 그리고 균형을 잃지 않겠노라 읊조리곤 한다. 나를 비롯한 부모들은 매일 다짐하고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자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