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안(眼)>
이미 떠나버린 버스가 밉지 않은 밤이었습니다. 저는 종종 술을 마시면 술이 깰 때까지 걷다 집에 들어간 적이 많습니다.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길을 따라 걷고 싶었던 날이었습니다. 물론 버스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노래를 틀어놓고 한참을 걸었습니다. 딱히 무언가 생각을 하며 걸은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노래에 집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걱정도 없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 몰입이 됐다는 것. 이는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윽고 제 평화는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주 지나다니지만 이름 모를 다리를 반쯤 건넜을 와중이었습니다. 멜로디가 들릴락 말락 한 휴대폰 노랫소리를 뚫고, 뭔지도 모를 것에 빠져있는 제 생각도 뚫고, 그리고 옆의 시끄러운 차 소리도 뚫은 어떤 소리들. 무엇인가 해서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부부께서 다리를 따라 걷고 계셨습니다. 조금씩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보니 아무래도 한 잔 걸치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두 분은 서로를 기둥 삼아 지탱한 채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걸으셨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제 귀에 박혔던 것은 놓쳐선 안 될 두 사람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습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코 그분들을 앞질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되려 제 존재를 없애기 위해 발소리를 줄였고, 평소보다 더 천천히 두 분의 뒤를 사뿐히 지르밟았습니다.
앞의 두 분을 보며 관계라는 것은 참 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급히 먹으면 체할까 싶어 나뭇잎 두어 개를 띄운 그런 물 말입니다. 잔뜩 몰려오는 갈증을 쫓아내려 벌컥 들이키면서도, 입술을 톡톡 건드리는 나뭇잎에 잠시 숨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 때는 저희가 관계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또 남은 물을 마시다 또 한 번 멈춰 서서는 나뭇잎을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때도 또 한 번 관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지요.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는 관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마라톤마저도 숨을 돌릴 때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싸우기도 해야겠습니다. 물을 마실 때 나뭇잎이 있다면 얼마나 거슬리겠습니까. 한참을 째려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얼핏 보기엔 싸우려고 드는 것일 수도, 실제로 싸우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사실 앎의 과정이겠습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물 먹는 것을 방해하느냐고. 내게 무엇이 불만이느냐고 나뭇잎에게도 물어봐야겠지요. 그래야 우리도 이유를 알지 않겠습니까. 서로 어느 정도의 납득의 시간을 가진 후, 가라앉아 주는 나뭇잎 사이로 다시금 물을 마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남은 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우리는 조금 아는 사이라 말할 수 있게 되겠습니다.
어느새 다리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두 분은 손을 맞잡고 계셨습니다. 두 분은 확실히 서로를 잘 아는 사이겠네요. 아직까지도 노랫소리는 크게 들려왔습니다. 계속 똑같은 노래만 부르시는 것이 정말로 좋아하는 노래인가 보다 했습니다. 문득 노래 제목이 궁금해서 휴대폰을 꺼내 노래 찾기를 틀었습니다. 차가 많이 지나가고 있어서 그런지 노래는 끝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일 테니 휴대폰을 얼른 집어넣고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두 분은 확실히 가수셨습니다. 물에 무언가를 더하는 사람들이요. 가수(加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