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서의 내디딤
남편이 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했다.
내가 잊을만할 때쯤이면 종종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별다른 일상이랄 건 없었어도 차분히 앉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글을 쓴다는 것이 내 몫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넷과 부대끼며 가정주부와 엄마로 산 25여 년의 시간은 나에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을 남겨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2022년 2월쯤, 남편이 나에게 브런치에 내 이름으로 등록을 해두었다며 시간 될 때 짬짬이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을 때만 해도 너메집 마누라에게 하는 소리로만 들었다.
누가?
라며 속으로 변변찮게 늘어놓는 허름한 이유들은 볼품없었지만 자신감이 쉽사리 용기를 내주질 않았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특별하고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흡사 우주복도 없이 우주선을 타겠다는 얼토당토 한 말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 나이에(?) 겁도 없이 글을 써보라는 남편의 말이 격려로만은 들리질 않았다. 분명 나를 배려하며 살펴준 말이었을 텐데 마치 심심풀이 땅콩처럼 해보라는 말처럼 들려서 마음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내 두려움을 대충 포장해서는 무덤덤한 무시로 되돌려 주곤 했다.
브런치가 내가 좋아하는 먹는 건 줄로만 알고 예외 없는 분주한 일상에 실려 또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원래 카톡이건 문자건 그게 무슨 단체나 기관에서 오는 공지사항이거나 광고성 글이면 아예 열어보지도 않는 무식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브런치 광고 카톡을 요리조리 비껴갔다. 그러다가 사라지지 않는 번호 1을 지우려고 브런치 공문을 열었다.
"제10회 브러치 북 출판 프로젝트.... 상금 500만 원.."
순간 눈깔이 돌아갔... 아니 눈이 뒤집혔.... 아니 아니지, 흠흠! 나의~ 시선이~ 머물렀다.
'정말??? 상금이 있었다고?'
처음 브런치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던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는 마련해 두었다는 글쓰기 공간을 아예 들러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무심한 마누라의 시큰둥한 반응에 남편도 더 할 말이 없었는지 그렇게 서로 잊어버리고 있을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임플란트와 어깨 수술에 관한 비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산수시험 때 겪은 사건(!?) 이후로 숫자와 담을 쌓아버린 내가 그 순간,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기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사실은 요즘 친정에 다니러 올 때마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었다. 아픈 오른쪽 어깨와 팔 때문에 엄마가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하신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못 치료를 받으셔서 치통으로 고생하시는 친정 엄마를 볼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팠었다. 이왕이면 한국에 모시고 가서 제대로 치료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내가 가진 그 "내 돈"이 없었다.
물론 남편과 형제들이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엄마가 원하시지도 않으신다. 그렇지만 뭐 하나 변변하게 해 드린 것도 없이 시집가서 20년을 타주에서 떨어져 살았던 나다. 이제 좀 느리게 가도 좋을 계절을 만나게 되니 너무 많이 늙어버리신 부모님께 요샛말로 내돈내산으로 뭐든 효도 비슷한 거라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마감일까지 고작 한 달도 안 남았다.
큰일이다.
그래도 일단 가보자!
엄마를 위해서!'
일단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삽시간에 머리가 하얘졌다.
'나 뭘 쓰지?'
'뭘 쓸 수 있지?'
'나 잘하는 거 뭐지?....
돈에 눈이 멀어 잠시 정신줄을 놓아버린 나는 쓸 재료가 없는 텅 빈 글창고와 마주해야 했다. 쓰긴 써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쓸만한 소재는 더더욱 없다. 굳어버린 머리 다시 회전 시작..
'나 제일 많이 했던 거, 프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그래도 20년 넘게 하면서 살았던 거는....
음... 밥 하고 빨래하고 애 키우고....(남들 다 하는 거, 그것도 그다지 잘하고 있다고는...) 일단~ 패스!
집안 청소...(꿀팁이 있다거나 딱히 깨끗하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같...) 에이~ 이것도 패스!
저것도 패스! 또 패스! 자꾸 패스! 계속 패스!....ㅜㅠ
그러고 나니 뭐가 없다.
다시 급 착하고 겸손하다 못해 비굴한(?!) 자세로 나에게 묻는다.
'그거라도 글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의기 소침하게 내가 나에게 말해보았다.
점점 땅으로 꺼져가는 나의 자존감과 주저앉아버리려는 내 정신줄을 세차게 휘어잡아 빈약한 내 의지에 단단히 묶어두었다. 지금은 자료조사도, 무엇인가를 시간 들여 읽고 쓰고 정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글 주제를 '나'로 정하고 '나의 시간'들 속에 있는 '내 삶의 이야기들'을 꺼내 쓰기로 했다.
'정말이지 무슨 배짱이었을까?'
그러나 첫 번째 난관 봉착!
먼저 작가로 승인이 되어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틈타 순식간에 글 몇 편을 써 내려갔다. 짬짬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마감에 쫓기는 짜릿한 긴장감을 느껴보니 죽어있지도 않았던 내가 다시 살아나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자정을 한참이나 넘긴 후까지도 쓰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은 순간에 노트북을 덮었다. 그렇게 며칠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내 몸통만 한 돌덩이가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한 무거운 몸으로 잠들기 여러 날 후, 꼼꼼하게 다듬어 보지도 못한 채 허접하게 완성한 몇 편의 글들을 작가 신청하기에 먼저 보냈다. 작가 승인 소요 시간이 적어도 5일 이상이 된다고 했으니 결과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마음이 급했던 나는 일단 (내 마음대로) 패스했다 고치고 계속 써 내려갔다. 대학생 때에도 이렇게 집중해서 초스피드로 글을 썼었던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돈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ㅎㅎㅎ)
그 후 며칠 후, 짐작했던 대로 브런치 측으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예상했던 거긴 했지만 나에게 실패의 맛은 유독 쓰다. 슬퍼할 겨를도 없다. 도움이 될만한 글 몇 편을 찾아서 후다닥 읽고 수정을 거친 후 다시 신청했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 이메일을 받았다.
수요일, 10월 26일, 새벽 5시 8분,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썼고, 보낸 것도 내가 맞는데..., 내가 합격을 다 받다니... 가끔은 정말 운이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는데 이제부터라도 맘 고쳐 먹고 싶을 만큼 감사한 마음 만빵이었다. 그러나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다시 빛의 속도로 쓰기 시작했다.
오는 주말은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해서 친정에 가야만 했다. 집중해서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 더 부족하게 돼버린 셈이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미리 써놓고 보자는 생각에 혼자 있는 시간을 오로지 글을 쓰는데만 사용했다. 나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보는 것도 어색했지만, 기억을 더듬고, 그걸 정리하고, 무엇에 이끌리듯 써 내려가다가 멈추고, 또 생각하고 다시 써내려 가기를 반복하는 나의 모습이 기분 좋게 낯설기도 했다.
아이들 도시락 싸고 쓰고, 라이드 해주면서 머릿속으로 글감을 생각하고 정리하고, 학교 내려놓고 집에 돌아와서 쓰고, 빨래하고 쓰고, 빨래를 말리는 동안 쓰고, 청소 접어두고 (원래도 잘 안 하는 건 안 비밀) 쓰고, 설거지하고 쓰고, 가족들이 다 잠들고 난 후 쓰고, 그렇게 쓰고 또 쓰고 해서 마감을 코앞에 두고 겨우 마쳤다.
너무 허접하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일단 끝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어느 지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타협해야만 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맨 정신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난관에 봉착, 비록 그럴싸하게 멋을 부려보지도 못한 작품이긴 하지만 브런치 북을 설명대로 만들었는데 무슨 일에선지 접수가 되질 않았다. 여러 번 글을 전송하려고 밤새 시도했었는데 잘 되지 않아 난감했다.
'미국에서 보내서 그런가...'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하고, 또 워낙 둘째가라면 서러울 컴맹인 일인자인 나로서는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만 애달파했을 뿐이다. 사실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고 벌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떨어질게 뻔할 테니(!) 조용히 시도해 보고 또 조용히 묻으려고. (나름 범죄자 모드..ㅎㅎ)
결국은 응모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감일이 지나버렸다. 이삼일 가족들 눈치 못 채게 혼자 가슴앓이를 했다. 며칠 후, 카톡에 브런치 공지메일이 카톡대도 단단히 삐져서(?) 눈길도 주지 않고 그렇게 이틀인가 모른 척하다가 이번에도 그 번호 1을 지우려고 문자를 열었다.
공지사항은 응모 기간 동안 발생한 오류로 인해 응모기간을 일주일 연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운명인가...?' 했다. (혼자 어설픈 일인 드라마 쓰는 거 좋아하는 스타일. ㅎㅎ) 비록 큰 차이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조금 더 주어진 시간 동안 써 놓은 글을 메 만지고 다듬으며 다시 내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밀어내버린 용기를 꺼내 먼지를 털어보았다. 그런데 막상 응모를 하려고 하니 내가 할 수 없는 몇 가지 사항들이 있었다. 큰 딸과 작은 딸아이가 발 벗고 도와주었지만 아무래도 한글에 한계가 있었던지라 할 수없이 응모 마감일날 아침(미국 시간으로) 조깅을 마치고 온 남편이 땀도 닦지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후다닥 설명서를 읽어가며 어찌어찌해서 얼렁뚱땅 책을 마쳤다.
그걸로 된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