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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Dec 13. 2022

아마겟돈 타임

반항할 수 없는.

검은 바탕의 프레임 위에 영화의 타이틀이 그리피티로 표현이 되며 영화가 시작된다. 조금 이상한 점은 그 그리피티가  왼쪽 상단부에 매우 작게 표시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스스로 자신의 제목을 작게 표현할 때, 이는 괴상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작게 표시한 이유가 바로 다음 프레임에 드러나는데 영화 타이틀은 공원과 빌딩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적혀있다.

그리피티가 길거리의 벽면에 낙서처럼 하는 미술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타이틀은 땅 위에 존재하는 그 모든 곳에 그리피티를 할 용기조차 없음이 타이틀로 드러난다. 특히  하늘 위에 작성함으로써 이것이 엽서 위에 찍힌 우체국 마크같이 보이게 만드는 착각을 들게 한다. (이 엽서의 송신 시기가 과거인지 미래인지는 쉬이 알 수가 없다. )

거두상

영화는 의도적으로 머리에 주목한다.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고 있는 '폴'의 연습장에는 선생님의 얼굴과 새의 몸이 연결되어 있다.  그림으로 드러난 폴의 속마음처럼 영화는 끊임없이 그들의 얼굴을 주목한다. 그것이 어른이건 아이이건,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의도적으로 얼굴 위주로 프레임을 구성한다. 뒤에 눈이 달리지도 않았고,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죠니에게 내 앞에서 까불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선생처럼 무용한 몸과  한계를 지닌 머리를 이분법화 한다. 조금 자세히 말해보자면  얼굴에 있는 시각과 청각과도 같은 능력들을 불신하고 있다.  오히려 머리의 능력보다 머리에서 터질 것 같은 스트레스, 망상에 더 초점을 둔다.  앤서니 홉킨스 경(이하 애런)은 자신의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는 머리가 아프고 난 무릎이 아프구나' . 

그렇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머리의 샷을 잡는다는 것은 몸을 보여주길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몸을 프레임 한가운데 놓는 장면들은  식인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했던 한니발 렉터에게만(앤서니 홉킨스) 허용되는데, 그런 그조차 걷다가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주고 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장면을 일부러 길게 잡음으로써  유일하게 허용된 몸의 무용성을 강조한다.(애런은 배관공인 어빙이 제대로 못 고치는 집의 몸도 고치고, 몸으로 일군 돈으로 젊은 손자들과 자식들을 움직이게 한다.)

 

그렇다면 초반에 폴이 그린 그림처럼  제대로 된 몸이 없다면 '머리'만 있는 신체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으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직 덜 자란 '아이'. 머리가 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덜 자란 아이의 미성숙함은 그림뿐 아니라 그 아이의 성격, 더 나아가 영화 전체에 깃든 어느 한탄으로 확장되어 간다. 제임스 그레이가 자신의 영화 최초로 '아이'를 내세워서 선보인 이유가 미성숙한 나를 통해 그 당시의 미성숙한 미국을 그리려고 했기 때문이라면,  그 미성숙의 발전상은 지금의 미국이어야 하는데 문제는 지금의 미국 또한 미성숙하다는 점일 것이다.  펠리니가 그토록 열렬하게 찬가를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비웃었던 '아마 코드'와 결이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에게 있어 '아이'는 순수함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고 비판함으로써 어른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이건 지금이건 어른의 위치가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행동'하는 몸은 존재해서는 안 되며 '머리'만 존재하는 일종의 '아그리파'석고상과도 같은 머리만 있는 형체를 그린다.  이는 그동안 끊임없이 마초성을 강조하며 남성의 몸에 집중했던 서부극과 전 반대편에 놓여 있다. 

성과 말

이 비탄의 석고상과도 같은 형체에서 굉장히 이상한 장면이 존재한다. 온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에서 애런의 대사가 자막으로 안 나오는 장면이다. 맨 처음에 필자는 이것이 자막 담당자가 실수로 넣지 않은 장면인지 의심을 하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자막 실력이 그 정도 까진 아니기에 의도적으로 넣지 않은 장면이라고 가정하고 말을 하고자 한다. 

 폴의 전학을 결정하기 전에 애스더와 어빙, 그리고 애런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한 다음, 폴에게 전학을 권고한다. 전학을 권고할 때, 유대계를 암시하는 성 때문에 유럽 대륙에서 핍박을 받은 역사를 읊어준다.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애런과 앤 해서웨이와 제레미 스토롱이 연기하는 에스더 그리고 어빙이 성이 다른 이유가 드러난다.

그들에게 있어 '성'은 정착을 위한 첫 번째 보호색인 셈이다. 이와 달리 폴이 전학을 간 첫날 만났던 '트럼프'가문은 유난히도 '트럼프'라는 성에 자존심을 갖는다.  폴의 전학 첫날, 그들은 자신 있게 '영어'로서 자신들의 드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단상의 위치'에서 '레이건 지지'를 외치게 하고, '자신들이 일구어낸 성공의 역사'를 ' 설명한다.   존 딜이 연기한 프레드 트럼프(실제 트럼프의 아버지)와 제시카가 연기한 메리앤 트럼프는 (실제 트럼프의 누나) 자신의 성인 '트럼프'에 '아메리칸드림'을 연결시킨다. 그들에게 있어 '영어'는 '아메리칸드림'을 드러나게 하는 필수적 언어인 셈이다.

 하지만 애런네 가족들은 그러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영어'와 '그래프'라는 성은 그저 표피상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앤서니 홉킨스는 이야기한다. 자신의 성이 '라비노위츠'라고 말하면 일자리를 받지 못했고 대학에 갈 수가 없었다고.  '성'을 말하는 순간 그들에게 기회조차 주워지지 않는 상황들은 분명히 연속적으로 발생했을 것이고, '언어'를 '선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생존'에 관한 습관인 것이다.

자신의 '성'으로 인해 생겨난 생존의 방식을 사용한 자리가 폴의 전학이 결정되는 자리였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해 보인다.  청각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을 이해하는 굉장히 중요한 기관임을 상기해 본다면, 폴이 눈앞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청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폴은 식사 자리에서 앞세대의 습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인 것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아이'라는 설정은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위치로 배치시킨다. 그러니깐 이 영화는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라 아이와 같이 그 시대를 받아들이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나 홀로 집에 와 아마겟돈 타임을 비교하면 더 극명하게 필자가 말한 말의 뉘앙스를 알 것이다.  그래서 '아이'라는 설정이 이 영화에서 꽤나 순수해 보이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탄생

영화가 거두상처럼 정상적인 신체를 포기하고, 아이의 역할을 통해 수동적 운명성을 '언어'의 한계로서 드러내면서 제임스 그레이는 여기에 '자책'이라는 감성을 올려놓는다.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은 죠니가 경찰 조사실에서 취조를 받는 장면일 것이다. 영화는 죠니가 신발을 신지 못한 체 폴의 아지트에서 말을 할 때 조자 그의 서사에 들어가길 거부한다. 그런데 취조하다가 자신의 죄라고 덮어씌우는 순간에 죠니의 회상 시퀀스를 집어넣는다.  이 시퀀스를 죠니의 시퀀스라고 본다면 영화 내내 그에게 독단적 서사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생뚱맞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 죠니의 할머니와 인사하는 회상 시퀀스는 누구의 시퀀스인지 따져보았을 때, 폴도 아니고 폴의 아버지도, 경찰의 회상씬도 아니다. 이는 지극히 영화가 죠니에게 주는 회상 시퀀스이다. 

요 몇 년 사이에 필자가 느끼는 영화의 기조가 조금 변해 보이는 지점이 있는데,  이제 영화가 스스로 생각하고 말을 하는 위치에 들어선 것 같다는 것이다.  티탄에서 보인 '버스'에서의 강제 하차 장면이나,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보이는 '낭독'장면,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 또는 마틴 에덴에서 보이는 관객으로부터 도망 등, 내러티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태동하려는 노력들은 '멀티버스'라는 교묘한 단어를 통해 조금 더 '장르'의 법칙으로 확고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조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아마겟돈 타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이 죠나의 시퀀스는 백인 감독이 영화에 '죄책감'을 첨가하는 일종의(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 야훼의 숨결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영화를 통해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로 올려놓고 이 거두상에 '죄책감'이라는 숨결을 불어넣는다.  중요한 것은 이 '회상 시퀀스'는  폴의 죄책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에서 관객을 향해 집어넣은 '죄책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퀀스는 폴을 움직이게 하기 위한 '동력'과 별개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동력을 위한 '시퀀스'에서 나와야 하는 사람은 온전히 '그리운 몸'인 '한니발 렉터'옹의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를 침대 위로 소환시켜 놓고는 '힘들지?'라는 탄식을 한 번 내뱉게 한다. 영화는 그제야 '폴'이 집으로부터 그리고  학교로부터 멀어져 가는 트랙 아웃 형식을 취한다. 


사라진 몸이 그 아이의 상상에서 내뱉을 때야 비로소 영화도 그 아이도 움직인다. 하지만 폴이 자신을 속죄는 것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폴이 속한 세계, 영화는 손과 발이 없으니깐. 이 운명의 거두상은 영화가 온전한 손과 발이 없음을 인정하고 '죄책감'을 손과 발이 있는 관객을 향해 넘긴다.  그래서 관객이 지녀야 할 죄책감과 영화 속 주인공이 지녀야 할 양심의 가책을 따로 심어 놓는다.  이 두 곳을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게 하려면 정말 '죄책감'만 필요할까? 


영화가 오프닝과 달리 엔딩에선 다른 크기의 타이틀을 올리는데, 오프닝에서 '용기'가 없는 소심함이 후반부에 '대범함'으로 변경되는 것에서 일종의 강박, 그러니깐 이 타이틀이 가리키는 아마겟돈 타임'이 결국 '폴'만의 '타임'이라기 보다 그 죄책감을 가질 관객의 '타임'이기도 하다고 외치는 감독의 아우성이 식상해보이거나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어쨌건 기타노 다케시가 1990년대에 '기쿠지로의 여름'이라는 영화로 한 번 성공했듯이 제임스 그레이도 단순해 보이는 내러티브의 힘의 방향성을 회상 시퀀스의 삽입으로 뒤집음으로써  아주 간단하게 타이틀을 각인시킨 셈이다.(생각해 보니 기쿠지로의 여름도 엔딩에  타이틀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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