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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Jan 02. 2023

메모리아

새로운 정의 


내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을 처음 만난 게 10년이 더 되었고 그를 안 본 게 5년이 더 되었다.

찬란함의 무덤이나 메콩 호텔 같은 그의 작품들은 정식 개봉을 하기 않기 때문에 부지런하게도 영화제에서 보던가 혹은 서아시에서 참석해서 봐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갈구했던 감독은 아닌지라  잊었다.


사실 희한하게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처음 한국에 정식 소개가 되었을 그 시점에 (필자의 기억으론 디지털 영화제였을 것이다.) 페드로 코스타와 함께 21세기 영화의 성질을 바꿀 사람들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이 둘 외에도 그 당시 새로운 감독들이 한국에 소개가 되었는데  상당히  늦게 도착한 벨라 타르를 비롯하여  라브 디아즈와 왕빙, 알베르트 세라와 아요야마 신지 등의 등장은 2000년의 포문을 화양연화로 시작한 왕가위를 더욱 시간에 가두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이 중에서도  방점을 찍은 것은 역시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었다. 그는 다른 감독들이 해내지 못한  수상에 있어 최고의 성과인 칸영화제에 황금종려상을 받는 파란을 일으켰는데 (지금 봐도 미스터리긴 하다.)  그의 작품 '엉클 분미'가 부국 상영 당시 모두가 졸고 있었다는 전설적인 후일담은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필자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사실 5년간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 필자가 미학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 그가 영화관이 아닌  미술관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작인 메모리아는  2021년 칸을 뒤흔들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1년 넘게 영화제와 서아시에만 잠깐 맴돌았다.  찬란에서 정식 개봉시킬 거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정식 개봉을 하였다. cgv에서는 전국 상영관 중에 서울에 달랑 4개관 명동, 강변, 압구정, 여의도 만  주말에 배당하는 배짱을 보였고,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쪼개서 상영관으로 들어갔을 때  생각보다 관객이 너무 많아서 상당히 놀랬다. 


하여간 메모리아를 보는 내내 필자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변한 건지 ,아핏차퐁이 변한 건지, 영화가 변하는 건지 하여튼 뭐가 변하고 있는데 당최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핏차퐁의 여타 영화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정글'이 나오지만 그곳은 '태국'이 아니다. 왕가위가 해피투게더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구 반대편인 '콜롬비아'를 선택한 것 같지만, 영화를 보면 왕가위처럼 '고국의 정치적 상황'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새로운 '낯섦'과 '익숙함'이 공존했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단편적으로 판단하자면 사실상 '망명'과도 다름없는 개인의 '정치적 선택'인 것이 뻔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지만, 틸다 스윈튼은 아핏차퐁의 세계에서 대담하게도 데릭 저먼의 '블루' 속 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목소리'는 있지만 '형체'는 없다. 


감독과 배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뒤로하고  필자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의 영화가 너무 편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분명히 '서사'는 있지만 그 '서사' 조차 조립하기 힘들었던 전작들과 달리 관객 스스로 '정열'하기 쉬운 조립도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영화를 보는 눈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아핏차퐁이 상당히 내려놓았다는 인상이 유독 강했는데, 그가 이렇게 강력하게 미스터리 추적극을 표방했던 적이 있었나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시간 앞에 장사 없군. 5년간 많은 것이 흘렀나 보네'라며 그 혼란함을  감독의 변질로 빠르게 정의 내릴 즈음에  후반부 정글 속 사운드에서 '아차'를 외쳤다. 아핏차퐁은  이 편한 혹은 뻔해 보이는 할리우드 영화와도 같은 외피 안에서(영화의 표현으론 '코어') 그는 지금 카메라의 정의가 바뀌고 있음을 나지막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래의 영화들, 그러니깐 코로나 이후의 영화들의 추세는  '보다'의 힘을 맹신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어 보인다.90년 영화들이 명확해 보인 이유는 권선징악을 보여줘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것이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자가 예전에  소개한 조던 필 조차  Nope을 통해 '보다'를 함부로 맹신하지 말라고 말한다. 박찬욱도 보는 것을 사실이라 말하지 않는다.  봉준호는 냄새를 추가하였다. '보는 것'이 끝이 아니라 다른 감각들을 요구한다. 사실 이것은 난센스이다. 카메라가 오감을 만족하게 하는 방안이 '스펙터클'이라는 고전 영화들의 전례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자연스레 보는 것이 최적화된 '극장'의 존재, 그리고 영화의 존재론과 직결된다. 하지만  어느덧 코로나 시국에서 '극장에서의 보다'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현실로 인해 '보다'의 스펙터클을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 되어버린 듯해 보인다. (그래서 코로나 시국에 그냥 지나갔을 다리아스 마더의 '사운드 오브 메탈'은 그래서 상당히 중요해 보인다.)


  

2021년 메모리아가 칸에서 공개되었을 당시,  경쟁작이자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달리는 차보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고백'이었다. (똑같은 해에 칸에는 유령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영화를 이야기했다. 2021년 칸은 굉장히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 '고백'은 사실상 차의 동력이다. 차를 움직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라(심지어 주인공은 녹내장)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 듣는 것과 말하는 것으로 인해 사람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영화관이 펼쳐진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내내 보여주었던  '얼굴이 정면에 있는 거대한 서브젝트 숏'들은 우리를 직시하는 숏뿐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 릴이 상영될 수 있게 만드는 뇌를 자극하는 낭독인 셈이다. 영화가  단순히 이미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말을 한다. 지인이 말씀하신 표현인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음험한 기운'은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잡히지 않은 물질이 기억을 공유하고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아핏차퐁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사운드를 사용한 방식을 넘어 아예 소리를 이미지로부터 서로 다른 축으로 분리, 이동시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거리에 의한 원근감을 담아내기 위한 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카메라가 원근법- 인지의 역사를 더 이상 따라가지 않겠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이것은 단순히 브루노 뒤몽이 '프랑스'에서 선보인 정치적 전복을 위함도 아니고,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보여준 이미지의 전복 또한 아니다. 


메모리아의 카메라는 어떠한 전복 없이 카메라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프레임에 형상이 없어도 그것도 사실  '형상을 담은  것'이라고 영화 내내 이야기하고 있다.  위 말은  단순한 이미지의 나열이 영화가 아니듯 그저 이미지가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걸 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메모리아는 드라이브 마이 카와 똑같이 들려준다.  여기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와 다른 점은  기억의 축이자 영화의 방향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모든 것이 과거에 기대고 있고 그 과거로부터 앞을 향해 2차원으로 질주하면서 끝나지만, 아핏차퐁은 태국과 콜롬비아의 위치의 방향성처럼 정반대의 방향에서  (또는 완전히 다른 축)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어떠한 플래시백도 플래시 포워드도 없다. 심지어 드라이브 마이 카와 같은 정면 숏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들려준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운드가 들렸다. 그 사운드를 느낀다.  에르난은 이것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여기까지 우리는 모든 광경을 '보았다'.


그러다 영화는 불현듯 틸다가 에르난을 바라보는 정면 숏으로 전환한다. 이때부터 틸다 스윈트는 에르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바라보게 된다.  다시 들려오는 사운드.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인가, 이제 틸다가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에르난이 다시 말하는 것인가?


프레임 안의 공기를 가득 채운 사운드가 에르난의 피부를 타고 틸다의 피부로 거쳐 극장 내의 관객으로 향하는 것뿐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흐른다. 이 영화에서 방향성은 일방향이 아니다. 축을 초월한 다방향은  프레임안의 시공간을 뒤흔들고, 프레임을 너머 관객의 피부 또한  사운드로 두드린다.  아핏차퐁의 기존의 세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그의 세계가 프레임을 넘어 정말 직접적으로 관객의 피부에 느껴진다.  우리는 영화와 영화속 표현인- '공유'를 한 것이다.하지만  이 '공유'의 이미지는 비워 놓는다. 관객은 보았지만 보지 못했고 ,느꼈지만 형체는 알 수가 없다. '공유'에서 '보다'의 역할은 축소가 되고 '청각'과 '촉각'으로 느껴진 것들이 관객의 머릿속에 들어간다.


정말 영화는 끝내 유령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영화 상영이 끝나고 다른 관에서 아바타를 보러 가는 관객들을 보았다. 신기하게도 보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한쪽에서는 최첨단 3D로 가고 있고, 한쪽에서는 카메라의 기능 중에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정의를 다시 내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카메라'와  '보다'라는 것을 새롭게 정의 내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 모른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새로운 영화를 맞이해야 하는 새로운 관객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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