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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Jan 08. 2023

Bonds and All

불일치 


2022년은 티탄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본즈 앤 올로 마무리하였다. 인간이 메뉴인 영화로 새해 시작과 끝을 마무리했기에 기분은 좋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화판의 돌려 막기, 일종의 품앗이는 외국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카 구아디니노가 아핏차퐁으로 부터 촬영기사를 뺏어왔고 콜바넴을 촬영한 뒤, 자신의 페르소나 틸다를 앞세워 연속으로 서스페리아를 찍었다. 서스페리아 제작 이후에나 아핏차퐁은 자신의  촬영기사를 루카로부터  돌려받으면서 틸다를 묻고 더블로 받았기에 본즈 앤 올이 내심 불안해 보였으나 루카에게는 비장의 카드 '티모시'가 있었다.


Come back. 



'7월', 네브래스카주에서 리와 매런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매런이 리에게 고백한다.


"우리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


본즈앤올은 참 이상한 영화이다. 로드 무비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성장물이자 히어로물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다시 돌아가자고 말을 하는 영화이다. 이건 장르의 법칙에 있어서 '우리 죽으러 가자'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지만 돌아가자는 말에 영화는 그렇게 홀연히 '8월'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8월'에서 모두가 다 정상적으로 취업하고 있고 가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 따스한 리의 머릿속에 맴돌던 'sweet home'이자 매런이 꿈꾸던 'home'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이 간 장소를 정리하여 유추해 보자. 총 7개가 있다. 


1. 아버지가 있었지만 손가락을 깨물고 도망갔던  버지니아. 

2. 설리를 만났던 콜럼버스

3. 리를 만났던 인디애나

4. 처음 도살장 데이트했던 켄터키주

5. 브레드를 만났던 미주리

6. 같이 살인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 아이오와

7. 어머니가 있었을 거라고 믿었던 미네소타


그들이 정착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소리와 기억


본즈앤올의 오프닝을 이야기해야겠다. 영화는 첫 오프닝으로 '그림'을 보여준다. 그 그림에는 미국의 지평선과 송신탑들이 놓여있다. 파스텔톤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풍경화. 카메라는 천천히 마치 처음에 보여준 풍경화처럼 학교의 전경을 보여주다가 '소리'에 반응하여 갑자기 360도를 돌고는 피아노를 연주 중인 매런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고정되자마자  매런 옆에 친구가 앉아서 밤에 놀러 오라고 제안한다.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송신탑을 따라 쭉 오면 된다고 말을 건넨다.  늦은 밤, 그녀는 몰래 창문을 열고 그 친구의 집으로 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국 고등학생의 모습이고, 미국 마을의 풍경이다. 밤에 몰래 집에서 도망친  매런은 친구와 함께 유리 테이블 아래 누워서 '엄마'이야기를 하다가 코로 친구 몸의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소파에 앉은 또 다른 친구는 한 친구의 손에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에로티시즘이 풍기는 풍경을 관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보게 된다. 화장품, 두 여자, 비밀, 향수.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펼쳐진다. 매런은 친구의 손가락을 깨물어 먹는다. 


이때 이상하게도 피는 카메라에 묻지 않는다. 관객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게 함에도 불구하고 피가 중간에 유리라는 막을 통해서  카메라에 피가 묻지 않을 때 이 '식인'의 정도는 관객을 건드리지 않을 수준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다만 필자가 마음에 걸렸던 지점은 왜 영화가 소리에 반응했느냐는 점이다.

 그녀가 식인 하는 순간의 소리, 피아노를 쳤던 소리는 유리와 카메라의 렌즈를 넘어 생생하게 들린다. 


이 이상한 태도는 아버지가 '녹음기'를 놓고 가면서 더 증폭된다. 아버지는 매런의 출생신고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말'을 녹음한 Tape을 마치 유언처럼 남기고 떠나간다. 마치 아버지가 '테이프'가 갇힌 것처럼 그녀의 꿈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는 매런의 '친엄마'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간호사로 인해 그녀가 15년 전에 '편지'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건 그녀가 자기 손을 먹기 전에 쓴 편지인데 그 편지를 매런의 목소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엄마 자넬의 목소리로 보이스 오버가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의 손은 멀쩡한데 '말'을 녹음했다는 것이고, 어머니는 '손'은 멀쩡하지 않은데 그전에 '글'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상반된 두 컨셉은 공통적으로 침묵으로 일관하는데 이는 하나의 주장으로 귀결이 된다. '나는 이것으로 더 이상 할 말도 쓸 말도 없다'  두 부모의 진심을 안 끝에 그녀는 엄마의 사진도 아빠의 목소리도 다 버린다. 


부모가 음성과 문자로 기록을 했다면 리와 매런은 기록이 아니라 꿈을 꾼다. 

매런은 두 번 꿈을 꾸는데 이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꾸는 꿈이다. 아버지의 녹음파일이 먼저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하면 매런은 자신의 기억에 삭제되었던 어느 파편의 흔적들을 마주친다. 얼핏 보면 편지에서 작성된 아버지의 '증언'에 관한 이미지 같지만 곰곰이 상기한다면 편지에도 실려있지 않은 내용들이다. 아버지의 '증언'은 매런의 '식인'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꿈의 이미지들은  아버지가 피를 토하는 모습과도 같은 장면이다. 이는 아버지의 '증언'과 매런의 기억이 불일치인 것이다.  


증언과 이미지의 불일치는 리에게도 해당된다. 리의 동생은 아빠가 자신뿐 아니라 오빠도 때리기 시작했다고 했고 흥분한 오빠가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고 했다. 오빠의 옷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경찰 조사 결과 오빠의 피로 밝혀졌기에 아빠는 오빠 말대로 사라졌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리의 꿈은 다르다. 리가 어느 남자의 몸을 사정 없이 내려치는 모습이 나온다. 리 스스로 매런에게 고백하길 사건 당시 자기 몸에는 본인의 피가 흥건하다고 했다고 말했지만 이미지는 정 반대인 셈이다.  '증언'에 '목격','증거'를 토대로 생각해 보자면 매런과 리가 꿈에서 본 것은 연관이 없는 '과거의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꿈이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한다면 매런과 리는 똑같이 '기억'이 아니라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갈구했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꿈의 이미지는 '과거의 시간'과 '욕망'이 결합된 영상물로 표출된 것이다. 여기에 '이미지'는 '사건의 사실'보다  '마음의 상태'가 된다.  영화는 피아노 소리에 카메라를 멈춘 것처럼 '말의 힘'을 동력 삼아 구체화해 나가는 듯 보이지만 그들이 가는 곳에서 받아들이는 자세, 그 장소에 마주친 마음들은 오프닝의 풍경화처럼 '재현'으로서 이미지로 담아내는 것이다.  영화는 오로지 '이미지'로서 그들의 속마음을 표현하려고 한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라지는 아버지들 


아마도 지금 한국에서  꾸준히 정식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외국 감독들 중에서는 루카만큼 프레임 위에 무언가를 적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프레임에 글자들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과 동일시되다기 보다 하나의 '기록물'처럼 보이게 되는데 아마도 루카가 생각하는 영화는 '살아있다'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기록하다' 일 것이다. 콜바넴에서 '어느 여름날'로 시작하는 것처럼 그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기록한다.


 필자가  구글 지도를 보며  본즈앤올에서 나온 지리를 쭈욱 검색을 해보았는데, 영화는 동북부에서 중북부까지 가는 여정을 따라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소들과 날짜들이 표시되지만, 정확한 위치와 시간은 가려진다. 이 기록물은 '다큐'의 기조보다 '챕터'의 성격이 강한 기록물인 것이다. 각 챕터별로 시간과 장소가 하나로 분기가 되어있다고 한다면 이는 필히 매런과 리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곳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추억이 깃든 장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장소는 어디였을까? 위의 리스트를 보면  '여기다'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 나오지 않는 챕터.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생각하는 장소와 관객이 목격했던 장소가 불일치가 되는 셈이다. 


이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 영화와 주인공, 관객과 주인공, 말과 꿈 등 모든 것이 일치인 듯 보이나 불일치이다. 이 모든 것이 불일치인 세상 속에서 서로가 '같은 종족'인지 알 수 있는 것은 관객에게조차 비밀로 할 수 있는 '냄새'이다. 이 '냄새'- 후각만이  영화의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영화 속 물리적 거리를 넘나드는 오감 중 유일한 하나인 것이다.   이런 후각을 기준으로 위 리스트를 다시 본다면  결국 이들의 동선은 '나'의 기원을 찾는 여정이라기보다, '후각'에 반응하는 '이터'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언뜻 보면 '아버지'처럼 역할을 하는  설리와 브레드를 만나게 된다.  자식이 아버지를 필연적으로 넘어야 하는 승어부의 신화에서 영화는 제일 위험해 보이는 브레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설리를 죽이는 결말을 선택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네브래스카로 돌아와야 한다.   후반부 '8월'로 넘어가 보자. 여전히 그들은 '냄새'가 풍기는 요리를 하고 있다. 그들이 '섹스'를 하지 않고 '식인'을 한다는 설정은 이미 90년대에 게이, 레즈비언을 다룰 때 써먹었던 고리타분한 방식이다. 할리우드 관점에서 다가갈 수 없는 영원한 타자는 늘 괴물의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이탈리아 감독에게 이것은 상당한 불만처럼 보였던 것 같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지극히 가톨릭적 세계관으로 이들을 야훼의 말로 이루어진 세상에 천상의 피조물의 자격으로 땅 위에 올려놓지만 인간의 시선, 영향력에서는 (송전탑) 이들은 늘 괴물이라고 보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당연하게도 '할리우드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을 실현시키면서  이를 위협하는 타자로 설리를 선택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건 '나를 먹어줘'라고 말하는 리에 맞춰 갈비뼈를 뜯는 매런의 모습 뒤로  네브래스카의 장면으로 다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 장면을 오롯이 플래시백으로 본다면 분명 둘은 하나가 되는 감정적 폭이 큰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단 한 번도 플래시백이 없었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조금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8월'이라는 챕터에  지명도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의 저변에 기대고 있는 이미지들이 항상 꿈처럼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시퀀스들은 어쩌면 네브래스카에서 그들이 꿈꾸었던 불안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사건에 원인이 되었던 사람이  '설리'인 것은 예언의 실현일 것이다.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아버지'의 부재로 시작된 여행이었고, '아버지'를 죽인 자와 함께 다니는, 이 영화에서는 유독 '아버지'의 자리가 매우 크게 느껴지는 영화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와 '아버지를 먹은 자'가 여행에서 만난 사람이 '브레드'와 '설리'였는데,   두 명다 직간접적으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다만  '매런'의 입장에서 보자면 욕망의 전염보다, 욕망의 통제와 학습을 가르쳤던 설리가 더 근접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런 설리가 그 순간  등장할 때, 두 명의 욕망이 해소될 기회를 얻는다. 하나는 리의 무의식 속에 투영된 욕망이고 두 번째는 매런이 계속 보았던 아버지의 혈토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아버지'를 '육체'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그들의 목숨을 거두어 간다. 천상의 피조물을 만든 것이 기존의 가치관에서는 '아버지'이기에  끊임없는 살부(殺父)의 비극을 영화는 투영한다. 그리고 그 살부(殺父)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버지의 감정과 서사를 일체 금지 시킨다. (매런이 리와 헤어지고 설리를 우연히  만나는 그녀와 관객이 느꼈던 공포감의 근원이 '애인이 되고 싶은 스토커 기질의 변태'였다면, 설리의 입장에선 설리가 매런에게 느꼈던 감정은 애인의 감정이라기 보다 일그러진 부녀의 관계에서 보이는 집착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부터 사실과 마음, 소리와 이미지의  모든 불일치가 생겨난다. 천상의 피조물을 만든 아버지, 나를 버린 아버지, 내가 죽이고 싶던 아버지,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힘에서부터 영화가 강제적으로 그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8월'의 이미지는 현실이 아닌 꿈이다. 특히 '설리'가 등장했기에 이는 '매런'의 꿈일 것이며, 그들이 돌아가자고 했을 때, 돌아갈지라도 언제가 덮쳐오는 공포-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다시 혼자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살부(殺父)의 숙명적 예언이 된다.  마지막에서 영화는 이미지의 주체를 단독으로 잡는 걸 포기 한 체 둘의 모습을 롱숏으로 담는다. 이 예언은 둘이 함께 그린 이미지인 것이다.


애초에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다.  이 부분이  필자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 지점인데  90년대  멜로의 분위기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가겠다는 희망찬 분위기가 있었지만 루카는 이제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이 세상을 만든 아버지를 끊임없이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위해 모든 것을 불일치 시킨다.  물론 90년대 미국 영화판을 뒤흔들었던 키즈의 히로인 '클로에 세비니'는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며 스스로 손이 없는 엄마 연기를 했지만 말이다. 


P.S 본즈앤올이 끝나고 사실 생각이 계속 들었던 것은 '아미 해머'의 식인 사건이 없었으면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라는 의구심이었다. 콜바넴의 그 멋진 아버지 마이클 스터버그를 너무나도 다른 역할을 배정하고 그 옆에 이터가 아닌데도 식인으로 변질된 캐릭터를 구축한 것은 아미 해머 때문이 분명해 보였다.   콜바넴의 마이클 스터버그도 영화에선 그를 흠모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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