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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Sep 25. 2023

여덟개의 산

Hole

1.서론 


스파이크 리가 깽판을 쳐놓은 2021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으로 '티탄'이 수상하였을 때  , 대부분의 평론가들처럼 나 또한  1994년 칸 영화제를 떠올렸다.  그 당시 영화제의 선택은 쿠엔틴의 펄프 픽션이었다.  수많은 평론가들은 그 수상이 할리우드와 칸의 밀월 때문일 거라며 그 당시 경쟁작에 있던  '올리브 나무 사이로'나 '레드'가 훨씬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평가는 변하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당시 수상자였던 쿠엔틴의 이후의 행보들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욕을 덜먹은 케이스가 되었다.  그렇다면 2021년 수상작인 티탄은 어떠할까?




지난 몇 년 동안  페미니즘에 대한 영화들이 메이저인 할리우드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세계의 변화에 기민하게 움직이던  할리우드에서 늘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더군다나 영화 산업이 코로나로 인해 지지부진할 때 쏟아져 나온 영화들,  마블 영화들은 다양한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앞세웠다. 이들의 노력이 바이든의 당선이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 잘은 모르겠으나,  트럼프 시대에 대한 반발은 문화에선 꽤나 거칠게 표현되었다.


2021 칸의 선택도 1994년과 유사하고 생각했다.  그들의 선택은  코로나 이후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맞춰 새로운 작가를 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트럼프 시대에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굉장히 도발적이며 힙해 보이는 영화에 칸이 손을 들어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갈수록 클레어 드니가 상복이 많아지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본다.)


2. 반란 


이러한 노력과 별개로 모두의 기대에 다시 입성한 바이든의 시대는 트럼프의 시대, 오바마의 시대보다 더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기대를 배신하는 박탈감과 혼란이 심해지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결국 과거의 삶, 가치관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물론 과거라는 표현이 부정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사회의 피로도가 높아졌다는 의미이다.)


일단 이 피로도에 대한 문화적 반격은 미국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자세한 설명은 유튜브로 대신한다. 




문제는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시대에 논의되고 저항하며 개선하려고 했던  평등을 지향하는 태도와 방식이 기존의 세대들에겐 자신들이  애초부터 누렸던 언어의 표현, 소비와 세금에 대해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첨예한 문제에  '자유'의 진영에서 선봉으로 들고일어난 것은  컨트리였다. 힙합이 즐비한 빌보드에 컨트리가 1위에 놓이는 .. 정말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존 덴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던 기독교적이며 안빈낙도한 삶은 이제 과거 미국적 가치관의  마지노선이 되어 저항의 상징으로 변해가고 있다.


3. Hole 




여덟 개의 산은 이런 태도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기독교적이면서 신화적이고 안빈낙도적인 태도들을 표현하는 수많은 상징들로 넘쳐난다. (31살 두 명이 62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폐허가 된 집을 다시 짓는 영화인데 이는 당연한 이야기다.) 영화 속 상징과 삶의 태도들은 자본으로  급변하는 사회에서의  가학과 관음적 자세로 다루기 좋은 소재이다.  사정없이 가해지는 가학적  공격들을 사이로  스스로 성스러운 위치로 올라가는 예수와  이를 무기력하게 보며 회개하고 있는 신도들처럼. 하지만 이 영화는 가학과 관음으로  폭발적인 감정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밀려오게 만든다. 그 이유는  영화의 형식인 내레이션과  1.37:1이라는 프레임에 있다. 


1.37:1은 요새 나오는 영상의 일반 화면 비율과 달라서 굉장히 좁게 볼 수밖에 없는 화면 비율이다.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도 1.37:1을 고수한 이유는 자연이 주는 스펙터클 보다 그 프레임의 중심에 들어간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가운데에 항상 사람이 있고 조그마한 집이 있다. 이는 지극히도 기독교적인 마인드이다. 신이 만들어준 세계를 함부로 알 수 없기에 적어도 인간이 활동하는 세상(영화적 표현으론)만  보겠다는 나지막한 자세는 프레임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신에 대한 겸손의 영상 비율이다.



하지만 실내 장면에서는 이것은 다른 의미로 된다. 말하며 등산하려는 브루노에게  쉴 때 이야기하자고 말 한 피에트로의 대사를 생각해 보면  영화에서 그들이 속 깊은 마음을 터놓을 때는 야간이던가 혹은 실내 어두운 장면이었다. 이 때문에 화면의 비율로 잘려나간 영상의 자리를 대신하는 검은 화면들-일명 음대(音帶)는 그들이 다시 만든 어두운 집에서 어디까지가 화면 비율이고 집의 기둥들인 건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진짜 의도가 드러난다.  프레임의 축소는 단순히 프레임의 중심에 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내적 마음의 공간을 들여다보기 위한 외부에서 뚫어놓은  하나의 구멍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 구멍이 엔딩 시퀀스처럼 절대 톱으로 잘려나간 구멍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태초에 존재하던 구멍.그 구멍은 크레바스도 아니고 토리노의 건물로 둘러싸인 구멍과도 같은 광장도 아니다. 그 구멍은 관찰의 구멍인듯하지만 실은 피에트로와 브루노, 관객을 연결해 주는 구멍이다. 이 구멍으로 인해 그 둘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구멍으로 통해 시간과 마음을 공유한다. 특히나  여기에 사용되는 내레이션과 음악은 영화 밖에서 그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간절함이 영화 안으로  뻗어나가게 하는 유일한 영화적 힘이자 성령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구멍이라는 프레임의 구조로 인해 발생된 결과이다. 즉 영화 안의 이야기보다 프레임 밖에서 이 영화가 추구하는  '세계를 연결하고 지키려 하는 의지' 그리고 이를 위한 통로로서 프레임이 사용된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 음악과 그 배경이 유난히도 기독교적이라기보다 서부적이라는 것에 있다.  단순히 대서양을 초월하여 서구 문명이 연결되는 것을 목도하게 것이 아니라 마카로니웨스턴의 창시자를 배출한 곳인  이탈리아를 지극히 고전적인 미국 서부극의 세계와 중첩하며 강제로 만든 기이한 태도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의 풍경과 모뉴먼트 벨리는 균질한 것인가라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미국이 세계가 될 수도 세계가 미국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 30년 넘게 증명된 이 상황에서 그 숭고한 정신은 균질하다고 말할 때,  과연 '균질성'은  세계의 '위급함'으로 인해 강제로 생성될 수 있는가?


이는 격변의 시대의 무기력감과 피로감에 대한 고백인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미국의 정신과 미국이 만든 세계를 그리워하는 유럽의 고백인 건인가? 그 구멍 끝인 각각의 반대편에서 천장(天葬)으로 사라진 브루노 대신에 마틴 에덴은 누구와 연결을 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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