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의 운동
이 영화는 무엇일까?
영화가 끝난 다음 계속 알 수 없는 당혹감이 밀려왔다. 수많은 명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감이 안 왔기 때문이었다 허문영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그는 늘 퍼즐에 매혹당했다. 그 퍼즐은 일종의 게임의 퀘스트와도 같은 것이며, 물리라는 마법을 만나 영화를 완성한다. 다크나이트, 테넷, 인셉션, 됭케르크, 인터스텔라와 같은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테두리 안에서 완성되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선택은 관객에게 익숙한 장면- 'Home'으로의 귀환이었다. 최신 과학을 입혔다는 '인터스텔라'에서조차 5차원 이후의 장면은 언제나 영화적인 표현력과 가족영화라는 장르로 도착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이 오펜하이머 또한 관객들에게 익숙한 끝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다줄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이 지점에서 배신을 한다.
태초
일단 먼저 문자를 이야기해 보자.
이 영화에서는 신문의 헤드라인만 비춰줄 뿐 그 어떤 문자도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칠판에 적힌 수식을 놓고 토론하는 장면도 없고, 증명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텔러의 수식은 A4지에 적혀만 있으며 과학자들만 공유한다. 오펜하이머의 손으로 넘어간 난제들에서 그가 하는 것이라곤 명령과 질문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딱 두 명만이 글을 낭독한다는 것이다. 원자력위원회 청문회 자리에서 문서를 읽는 자는 피셔 대령과 윌리엄 보든이다.
위문장을 읽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 태드록의 가슴 장면을 예로 들며 오펜하이머가 산스크리스트언어를 영어로 낭독한 장면을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나는 우스갯소리로 진 태드록의 가슴 때문에 기억하냐고 되물을 것이다.)
필자는 그 장면에서 그가 산스크리스트언어를 읽었다는 것보다 그가 원어로 읽는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진과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자본론을 읽었다며 '소유'에 관련된 문장을 읊는다. 그러자 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짓고는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재산'이라고 반박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자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원어인 독어'로 읽었다고 답한다. 영어의 원류가 라틴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영화에서 그가 영어를 읽은 적은 없다. 영화는 이상하게도 그를 '태초의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서구에서 태초의 인간을 표현할 때 늘 사용하는 기독교적 사상 또한 영화는 적극적으로 끌어드리지 않는다. ( 자식은 있으되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 빗방울로 만들어지는 파동들을 내려보는 오펜하이머의 시선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그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태초의 세상'이라는 것을 은유한다. 더 나아가 아담과 이브를 떠올리게 하는 '사과'를 보여주지만 그것을 먹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것을 '죽음'의 이미지와 결부시킨다. 그에게 태초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는 오직 라비가 주는 귤만 먹는다.)
'진리'를 찾을 때 (혹은 '진리'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시기 ) 보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신이 만든 세계라기 보다 원자의 이미지이자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질 때의 미시세계의 이미지들이다. 이 미시를 향한 시선은 그의 이동에 따라 버즈 아이즈 뷰로 비춰주는 도시, 사막 등 거시의 이미지들로 인해 증폭된다. 영화는 아주 자연스레 가장 작은 곳의 모습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곳의 가장 거대한 이미지까지 세계를 수직으로 쌓아 올린다.
궤도
이런 이미지들과 별개로 영화는 두 가지 사건을 축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오펜하이머가 주가 되는 청문회이며, 다른 하나는 스트로스가 주가 되는 청문회이다. 컬러와 흑백으로 이루어진 구조로 인해 대칭으로 보이나 실은 두 곳 다 '말'로 시작하며 재판이 아닌 청문회이고 벌이 아닌 물러나는 결말로 간다. 그렇기에 이 두 축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 가 아니라 ' 이 영화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였다.
영화가 보여주는 '서사'들을 시간 테이블로 나열하였을 때 어디가 시작점이고 어디가 끝일까?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가 기억을 공유하는 부분들 또한 영화에서 계속 반복된다. 시선과 시간의 차이를 둔 반복성으로 영화는 자연스레 순환의 굴레로 들어간다. 이것은 반복되는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인해 어디가 시작인지 더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오펜하이머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거대한 공포의 이미지들은 후반부에 반복될 때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미 전반부에 본 '과거'이다. 영화의 마지막인 그가 상상하는 수상 받는 장면 또한 '미래'라기보다 그가 아인슈타인을 만났을 때 그의 예언이 현실이 될 것을 상상하던 장면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성'을 제외하고 영화가 주는 이미지만 보았을 때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알 수가 없고 동일한 지점들이 계속 겹쳐진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흑백과 칼라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동시에 움직이면서 몇몇 지점에 충돌한다면? 아니 동일한 지점을 통과한다면? 마치 확률로 움직이는 원자의 궤도와 같이 말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포착하는 순간은 두 세계의 움직임의 흔적들이며 두 인물들의 감정들이다. 여기에 '청문회'라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은 '기록(문자)'보다 '음성(소리)'이며, 수많은 증거가 아닌 증언들로 인해 요동치는 감정을 따라간다. 그 감정의 파장에 우리가 목도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얼굴이다. 이미지들과 그 바탕이 되는 감정들은 추상적 이미지들의 증폭을 통해 폭발한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중요한 폭발은 트리니티에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의 폭발이며, 그 폭발 뒤에 휘몰아치는 두려움이라는 진동이다.
핵
원자의 궤도는 확률적 운동이며 카메라가 이를 궤도처럼 돌고 있다면 핵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챕터들의 제목인 '핵분열'이건 '핵융합'이건 핵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상기한다면 자연스레 이 질문에 도달한다. '이 영화의 핵은 무엇일까? '스트로스일까 오펜하이머일까 아니면 아인슈타인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의 중심이 오펜하이머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도 스트로스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오펜하이머의 과거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스트로스의 증언과 시선을 토대로 구성되는 기억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와 같이 살리에르의 증언으로 구체화되지만 주종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전기 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증언들을 토대로 재현하는 영화의 운동은 '확률'을 빙자한 움직임이다. 이 확률의 세계는 오펜하이머가 스스로 말하는 양자역학의 대표적인 특징인 '모순(paradox)'을 가득 담고 움직인다. 핵분열을 바탕으로 하는 원폭을 만들었지만 모든 과학자를 결합시킨 자와 핵결합을 토대로 수소폭탄 제조에 참여하지만 과학자들을 분열시킨 자. 여기에는 '사건'만 있을 뿐이다. 그 사건 속에서 우리가 역사 시간이나 책, 영화로 접한 기록된 영상,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가 원폭 피해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관객들에게 절대 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았듯 오직 그들이 그 당시에 느낀 '감정적 재현'에 집중한다. 일반적인 전기 영화라고 볼 수도 없고 다큐라고도 할 수 없으며 일반적인 드라마도 볼 수 없는 이 복잡한 심리 영화는 고도로 만들어진 핵을 알 수 없는 원자 궤도 모형인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핵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인가? 그러기엔 그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우리는 보았다. 내 아주 단편적인 생각은 양자역학이 지금도 계속 발전해 나가고 있듯, 감독은 이 작은 미시의 세계들은을 쉬이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펜하이머조차 그와 상반되는 인물들의 태도와 고백들로서 예측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오펜하이머의 과거이기도 한 텔러와 오펜하이머의 미래이기도 한 아인슈타인은 이 영화에서 본질의 시제 역할을 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영화는 자신의 핵을 보여주는 대신에 '본분'을 알 수 없는 자들을 허망하게 추락시키고, 야심 차게 그들이 발견한 미시의 세계로 만들어진 묵시록적 거시의 세계를 보여준다. 오펜하이머가 그렸던 (혹은 보았던) 아주 조그마한 미시의 세계는 어느덧 커다란 지구- 거시의 세계로 증폭한다. 그 순간 오펜하이머는 일개 전자일 뿐이다. 놀란의 특기 혹은 법칙인 Home도 없고 퍼즐도 없고, 물리학적 왜곡을 허용하게 만드는 연출도 없다. 오직 파국만 있을 뿐이다. 이 영화가 쏟아내는 수많은 감정의 파편을 감당할 인간은 존재할까?
P.S 1. 오랜만에 지인분들과 모여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면서 내가 이 영화에 너무 경도된 것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었다. 워낙 그의 전작과 달라서 그런 건가 위로하지만..
만나서 이야기할수록 미궁 속에 빠졌던 작품.... 놀란 이 이런 적이 있었던가...?
2. 아인슈타인은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목격자인 '로렌스'인 '톰 콘티'이시다. 캐스팅 디렉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3. 크리스토퍼 놀런의 위치는 미국에서 어느 위치인 것인가? 알다가도 모를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