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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Sep 29. 2023

어파이어

전상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버닝이 생각났다. 버닝에서 유아인이 후반부에 썼던 소설은 아마 '어파이어'였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꺼져가는 불길을 뒤로한 채 사라져간 문하생 '종수'와 주변을 보지 못하다가 결국 피부로 충격을 체감한 자인 작가 '레온'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폴라 비어의 매력적인 미소는 영화 버닝의 혜미를 떠올리게 만든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둘 다 '주인공'을 자각하게 만드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지점에서도 두 작품은 매우 닮아 있다. 설정상 차이가 있다면 한쪽에서는 정치적 참사인 용산참사가 있고, 한쪽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만든 환경재앙인 대규모 화재가 있을 뿐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이창동 영화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독일과 한국이라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공통점들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르는 '종수'와 '레온' , 그들 앞에 놓인 대재앙. 그들이 마주치는 추상적인 '죽음', 사라지는 전세대(前世代)와 예술론)이 비슷한 것은 세대와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것일까? 



버닝의 결말 부분에서 이창동은 전작 '시'와 달리 '본질을 모른다'라는 고백으로 선회한다. 세상의 이미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노쇠한 동력의 끝에서 버닝이 '탄식'으로 맺음을 하였다면 '어파이어'는 '그래도. 그래도!'를 외치며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외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운드와 이미지를 엇박자로 배치하여 '보다'의 한계를 극명하게 표현하지만, 이를 일종의 피로도가 주원인이 된 '기면증'으로 정의 내리고 조그마한 사회 네트워크로 '치유 가능한 것'처럼 풀어가는 감독의 방향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후반부가 편집장의 '내레이션'으로서 이미지와 사운드가 일치가 되어 3인칭으로 넘어갈 때, 알 수 없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발생한다.



카타르시스를 만들게 하는 '시점 변환'에 좀 더 주목을 해보고 싶다. 1인칭 시점에서 3인칭으로 변환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액자식 구성으로서 이 여름휴가를 닫으며 시제의 변화와 함께 주인공의 '변화'를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것이 쉽게 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실상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예술, 언어로 치환하자면 전혀 다른 의미의 암울한 장송곡이 된다. 시한부인 편집장의 목소리와 글에서 퇴짜를 맞은 레온 그리고 사라진 나디야의 존재는, 음성언어 (죽어가는 언어)가 한계를 지닌 영상언어를 정리할 수 있다는 언어학적인 태도로 받아들이기 충분하다. 다만 이 에너지는 일회성일 것이라고 고백한다. 영화는 모델과 사진작가를 죽이고, 문학박사인 나디야를 휠체어에 강제로 앉히며 기존 예술 매체의 노쇠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온은 그저 잘 풀리지 않는 작가인 것일까? 

이 지점에서 화자가 자연스레 3인칭으로 변하게 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는 '성장'영화 속 남자로서 표면상에 배치가 되지만 작가이기 전에 이 영화에서 '비어있는 내러티브'로서 그 역할을 다 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과 시간은 편집과 촬영으로 인해 '보다'의 한계점을 지니게 된다. 이 성질은 예술로 들어가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수동적인 카메라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타본 적이 없고 공간을 이동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의 세계에서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보기가 안되기 때문에 쓰기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그를 적극적으로서 '비어있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마무리를 '음성'으로 채운다. 우리가 보았던 레온의 시선은 음성으로서 시제가 정해지고, 감정이 정리가 되고 그의 시선과 시점에 의미가 부여된다. 결국 영상은 음성과 문자에 종속된 셈이다.



'Afire'는 영상매체가 동력이 멈추는 곳에서 자신을 성장시킨 예술 매체의 종말을 쓸쓸하게 바라보며 작성한 전상서인 셈이다. 



P.S


1. 편집장으로 나오는 배우 마티아스 브란트를 보고 정치인 빌리 브란트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실제 친아들...


2. 벽을 향해 공을 던지는 장면은 좀 너무 노골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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