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고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일까?
영화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를 굉장히 특이한 동물 다큐멘터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의 역사를 아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1960년대 브레송이 이미 보여준 당나귀 발타자르가 21세기에 다시 재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 것일까?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한 두편의 영화는 기독교적인 상징들로 자연스레 읽힌다. 이 상징들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의 육체를 영화가 '감히'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재현이 안되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외감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자주 변신하던 제우스처럼 예수를 관찰밖에 못하는 나약한 육체적 존재로 대체시킨다. 이 나약한 존재는 인간으로부터 분리가 된 듯 보이지만 육체의 한계로 인해 폭력적인 인간의 손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자연스레 인간들의 서사와 당나귀의 서사는 분리할 수가 없다. (혹은 악한 마음) 이 때문에 서사는 분리되지 않고 서사의 주체성과 능동성은 박탈당한다.
그로부터 60년 뒤에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그리고 20세기 영화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제작자인 제레미 토머스는 발타자르에 영화 매체의 미래를 추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처음부터 아주 노골적으로 "달리는 말"(Nope에도 나온 영화의 효시)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EO'에서의 당나귀의 시선은 인간이 외면한 것들이자 잘 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VR과 꿈( 자신의 몸이 로봇의 움직임으로 대체가 되는 영상)들로 구성이 되는데 이는 당나귀 자체의 시각이자 카메라의 예언, 물질의 욕망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극단적으로 보자면 인간들의 모습이 없는 것은 포스트 휴머니즘 같기도 하고 다시 나온 카메라 범신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먼저 발타자르를 보자.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브레송은 사람에서 벗어나서 말하지 못하는 존재로 사람을 관찰한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갈 때 타고 간 짐승이 당나귀이다,) 영화 스스로가 사람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단순히 영화의 서사에서의 '주인공들'뿐 아니라 스크린 밖 '사람' 즉 '관객'이다. 당나귀가 죽어갈 때도 관찰자의 위치(관객의 시점)에서 보여줌으로써 관찰자의 주체가 사람임을 말해준다. 이와 반대로 EO는 인간을 초월한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고,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발타자르와 다르게 죽는 순간에 블랙아웃시킴으로써 관객의 시선 또한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촬영과 편집의 주체는 엄연히 사람이다. 이 사실은 영화의 지향점과 상당히 모순적인 부분이다.
편집의 주체와 관찰자의 주체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주체적인 것 같지만 종속적이고, 당나귀의 시선이지만 매체 종사자의 욕망이 투여된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도 이 전제를 아는지 10분마다 끝나는 에피소드의 끝에서 EO가 프레임으로 나가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그 말은 항상 어디론가 덩그러니 장소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EO를 관념론적으로 봐야 할 것인가? 카메라를 유물론이 아닌 관념론적으로 보는 것은 가능한 것이던가?
설령 관념론이라도 할지라도 '말'은 존재하지 않았던가? 영화는 여기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는다.
파장은 있으되 영악한 편집의 마술의 한계를 느꼈던 80분의 기나긴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