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ny Sep 10. 2024

리볼버

육체와 빈 잔 

영화 중반부, 

신동호가 정윤선에게 묻는다.

"너 도대체 하수영이 뭐가 좋냐"

정윤선이 대답한다

"에브리씽" 


이 질문은 표면적으로 보자면 하수영을 대하는 정윤선의 행동을 궁금해한 신동호의 질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동호와 정윤선, 하수영 사이에 임석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임석용을 신동호에게, 정윤선에게,하수영에게  각각 대입을 하자면 이 대화는 굉장히 이상한 대화가 된다. 왜 필자는 임석용이라는 이름을 모두에게 한 번씩 대입을 했을까? 


워낙 최악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볼 마음은 없었다만, 시네마테크때부터 보았던 '오승옥'이라는 이름 석자 때문에 보았다.  누군가는 그의 전작 무뢰한을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았을 땐 시대를 완전 잘못 인지하고 태어난 영화처럼 보였다. 90년대 감성으로 충만한데 남자 여자 배우는 21세기 연기를 하고 있는 그 괴리감이 주는 당혹이라고 해야 할까? 감독 스스로 그것을 '찌린내'로서 표현을 하였다면 이 영화는 철저히 '잔'으로서 표현된다.


무뢰한에 원래 캐스팅이 예정이 되어 있었던 배우가 이정재였다는 뒷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철저히 속편처럼 보인다. 사랑에 배신당한 그녀가  출소 뒤에 행하는 복수. 하지만 그뿐이다. 


영화는  '김남길'이 아닌 '이정재'를 선택함으로써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을 전작과 차별하려고 시도한다. 

전작 무뢰한이 검거의 가능성과 사랑의 깊이가 반비례하는 연기를 하는 걸 봐야 했다면, 이번 영화는 배신당한 뒤부터 시작하지만 이상하게도 직진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되려 배우 이정재가 가지고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이용하며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이정재는 실제로 위스키 광고를 하였고 이정재, 전도연은 임상수의 하녀에서 계급의 위치에서 위스키를 따라주고 섹스를 하였다.) 그러니깐 전작의 '찌린내'는 계급의 욕망인 '잔'으로 바뀐 것이다. 무뢰한에서 보여주었던 '찌린내'나는 엔딩에서 왜 하필 욕망의 '잔'으로 방향을 바꾼 것일까?  


모든 술이 그렇듯, 혹은 사이다가 그렇듯,(정윤선의 전 남편이 집었던 유리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망이다. 이 영화는 욕망했기에 대신 치렀던  정당한 대가를 향해 돌진하는 척하지만, 욕망이라는 것을 채우는 것,  빈 잔을 채우는 내용물은 결국 임석용(이정재)으로 귀결된다.  그녀가 기다린 2년의 시간, 분양받을 아파트,  추적하는 장소,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또한 임석용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임석용을 이야기한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정윤선이 임석용의 부사수였던 신동호에게 임석용을 어설프게 따라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임석용이 속한 피카레스크에서 하수영이 가고 있는 길은 오직 그가 살아생전 갔던 길을 추적하는 것뿐인 것이다. 그러니깐 이 영화는 임석용이 있어야만 가능한 서사이며, 임석용의 몸이 존재해야만 채워지는 욕망의 끝인 것이다.  


문제는 그가 죽었다는 것이며 그를 대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의 모든 배우들의 가오는 임석용의 부재로 발생한  '허무적 가오'이다. 그 허무한 욕망을 벗어던지느냐 마느냐에서 영화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영화는 갑자기 숲속의 절로 들어가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업‘과도 같은 불교의 이미지를 빌린다. (이는 지극히도 호금전 스타일이다.) 오승옥 감독은 하수영의  입을 통해 '피의 댓가'가 아닌 마땅히 지켜야 할  ‘약속’이라는 것을 언급하며 느와르라는 장르에서 강호의 도를 중시하는 무협으로, 그리고 불가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임석용이 있는 자리에서 약속한 '돈'을 받아내고, 임석용이 밝혀냈던 진실에 대한 '침묵'을  약속한다.  이 영화에서 죽은 것은 오직 황정미와 임석용뿐.


이런 선택들로 인해 이 영화의 모든 것이  혼란해지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자. 영화는  분명히 하수영의 시점으로 출발을 했지만,  중반 이후 의도적으로 하수영 대신에 그레이스의 분량을 키운다. 그레이스를 통해 후반에서  느와르에 항상 존재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레이스 뿐  아니라 죽음, 죗값, 비밀이라는 성질로서 육체 없이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황정미, 그녀를 도와주는 정윤선(임석용과 동거했다고 하는) , 사수의 영향력에 있는 신동호, 임석용을 안타까워하는 민기현등. 그들 사이에  비어있는 임석용의 육체로 인해 각자가 변화무쌍에게 다른 선택을 하고  클로즈 업된 배우들의 얼굴을 통해  그들의 선택들에 감정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각자의 '잔'을 보여준다.   느와르의 상징이기도 한 남성의 육체를 의도적으로 소거하여, 각자의 빈 잔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는 태도가 합당할 수 있을까? 


이건 굉장히 얄팍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제3자의 시선을 빌려 의도적으로 임석용이 나오는 플래시백을 보여주거나 사진을 통해  임석용의 육체와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택함으로써, 영화 스스로  그들 각자의 얼굴 끝에서 임석용이라는 몸과 영향력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필요도 없는 임석용이 죽는 장면과 그 순간의 표정 변화를 정확히 보여준다.)  결론적으론 그들의 빈 잔에는 대체가 불가능한 임석용의 역할.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역할과  남자의 육체, 해결사와 같은 느와르에서 없어지지 않을 남성의 표상이 이 영화로 채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수영이 마지막에 쏘지 않았기 때문에 임석용의 느와르도 완성된다.  


그러니깐 이 모든 시발점인 배신과 약속이라는 것은 '정윤선'이 임석용의 태도를 묘사하는 대사처럼 그저 임석용이라는 캐릭터의 성격 그 자체인 셈이다.  하수영의 출소로 통해  임석용이라는 사람의 성격을, 그리고 하수영의 기억의 파편과 동선들을 통해 그의  몸을 영화는 차근차근 만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직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느와르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의 빈 곳을 그 누구도 대체하여 행동할 수 없게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종반, 이제 남은 것은 하수영이 2년 동안 복역할 때  임석용이 그의 재산과 다름없이 사용했던 아파트, 빈 '잔'처럼 공실인 '아파트' 뿐이다.  그 빈 아파트를 증여받은 황정미,  그리고 집문서를 가지고 있는 정윤선과 그것을 다시 돌려받으려는 하수영은 임석용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이다.  그녀들이 얻고자 하는 물질은  추상적인 임석용의 몸과 성격을 너머 그의 자본까지 구체화할 뿐이다.


과연 이런 구조와 방식들이 기존의 느와르와 달리 접근했다고 볼 수가 있을까?  오승옥 감독 스스로는 이것이 도전이고 진보였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저 '신선한척 하는, 과거로 복기하고자 하는 느와르'일 뿐이다. 되려 오히려 수많은 빈틈으로 인해 오승옥표 느와르의 진짜 속마음과 빈약한 골격들을 목격한 건 아닐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존 오브 인터레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