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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Jul 08.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인지와 소리 

쇼아를 본 필자에게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였다.  '그저 그런'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이 표현이 제일 적절한 것 같다. 하지만 이 '그저 그런'  감상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조나단 글레이저가 오스카에서 외국어 영화상에 수상소감을 하는 도중 '가자 지구의 폭격 중단 요청'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국계 유대인들과 심지어 '사울의 아들' 감독에게까지 엄청난 욕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순전히 그를 구하기 위해 쓰는 아주 짧디짧은 탄원서(?)이다.

역사의 비극을 재현할 때  발생하는 관음증과 스펙터클의 갈증, 그리고 윤리성 등에 대한 고찰은 이미 '쇼아'에서 보인 바가 있다. 물론  음성 언어로만 담는 쇼아의 태도에는 영상 언어를 낮게 보는 태도도 있을 뿐 아니라, 태초의 로고스'라는  한 구절로 시작되는 기독교-혹은 서구 문명의 위에 기반하면서 이 모든 것을 붕괴시키려는 태도 또한 가지고 있다.  함부로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의 재현성은(부정당하던 역사였던 것도 사실이다.)  90년이 되어서야 스필버그를 통해 할리우드 스타일로 그려진다. 간절한 스필버그의 바램 덕분에 이제 홀로코스트는 가짜 역사가 아닌 망각하지 말아야 할 역사로서 그 위치에 존재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는 '쉰들러 리스트'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 '인생은 아름다워', '사울의 아들'과도 같은 영화들로 계속 이어나간다. 

1.

예술이 탄생하는 데 있어 '모방'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모방'을 통해 예술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모방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현실의 본질을 무엇으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과 결을 같이 한다. 예술가가  '모방'한 결과물과  현실의 차이만큼 '현실'을 다시 반추하게 되는 일종의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예술작품들은 '드라마'라는 장르 위에 쓰였고, 자연스레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쓰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모방의 대상은 아우슈비츠에 끌려들어 간 사람들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퇴근 후의 일상이다.  회스의 가족들의 동선과 대사 그리고 모든 행동들을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사실을 기반으로 한 재현'된 이미지로서 그려진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처럼 원초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이 예술이고 그 시작이 모방이라면 이 모방의 결과물이 내놓는 이 영화의 본질은 그저 단순한 '퇴근 후의 삶'이라고 관객들 대부분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모습이 역겹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이 영화가 절대 넘지 않는 담장 밖의 모습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벽은 꽤나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벽'이라는 것은 공고한 건축물이다.  '종'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횡'으로만 움직이는 카메라의 방향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 속의 '벽'은 쉬이 넘어갈 수 없는 굳건한  건축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벽'은 그 너머에 대한 것들을 온전히 다 가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높이, 시점과 권력이라는 인간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가리되 가려지지 않은 그 현장의 건축물들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한다. 불길과 연기 그리고 '레드 아웃'과도 같은 이미지들은 머릿속에 수많은 학살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야망이 커진다.   다른 영화들이 저 벽 너머의 진실에 포커스를 맞추는 태도를 지닌다면 이 영화는 오히려 벽 안이 아니라 벽을 세운 자들에 관심을  두게 만든다. '벽'위로  삐죽삐죽 나와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이미지들은 무덤덤한 배우들의 표정과 대비되어 상당히 불쾌하고 역겹게 만든다. 단순히 '벽'이라는 것으로 아우슈비츠 옆에 살고 있는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파시즘'을  게토화하는 울타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벽'은 벽 뒤의 진실이 아닌 벽을 만든 악을 온전히 담으려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선(線)'인 셈이다. 

그들의 왕국에  배치된 고정된 카메라들은 이들을 하나의 실험체처럼 관찰한다. 자연스레 피사체들과 관객의 거리는 조정이 되고,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존재하는 제4의 벽은  공고해진다.  이 작업들에는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관객이 당연히도 왜 그것이 역겨운지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선 '사운드'만큼이나 '인지'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 '인지'는 영화 속 시간과 현재의 시간 차이로 만들어진 '진실'이자,  '파시즘의 일상'을 향한  '이성적 비명'이다. 

2.

 벽이 '파시즘 자체'를 남기고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인지로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면 역으로 악은 온전히 분리가 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벽 너머로 말을 걸 수는 있는지 생각을 해야 한다. '사운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운드'와 '시체 조각'만이 벽을 넘어 흘러넘치게  만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영화에서 펼쳐지는 모든 비명소리와  굉음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소리인 건지 들리지 않는 소리인 건지 관객이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리액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영화 밖에서 이것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소름 돋게 들릴 뿐이다. 회스가족의  무덤덤한 표정들은 디제시스 안에 발생하는  'In 사운드'를 벽 뒤의 소리가 궁금하게 만드는 '비화면 영역의 사운드'로,  더 나아가 영화 자체와 무관하게 들리는 비디제시스적인 'Off 사운드'로 변질시킨다.   

그러다가 이 영화는 갑자기 불현듯, 이미지로서 회스와 현재의 시간을 마주치게 한다. 좁디좁은 건물의 벽으로 막혀있던 이미지의 심도가 시간을 넘어 소리의 근원과 마주치게 될 때  소리의 심도만큼이나  악의 깊이가 깊었음이 밝혀진다.

여기에 두 가지 진실이 드러난다. 하나는 관객이 소리를 들으며 그렸던 청각의 시각화의 실체가 '유품'으로 드러남에 따라 거대한 추모의 공간으로 바뀐다는 것. 또 하나는 소리를 재생한 것이 아니라 (믹싱 혹은 ) 기괴한 소리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음악 연주가  모두 중단되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소재가 항상 가지고 있던 카메라의 윤리성이 아니라 사운드에 대한 우선순위와 함께  소리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아도르노의 말 - ' 홀로코스트 이후에 서정시는 가능한가?'와 궤를 같이 하는 걸까? )

필자가 계속 신경이 가는 부분은 소리의 윤리성 이전에 소리의 방향과 주최자이다. 중단된 두 번의 음악보다 미래에서 과거를 향한 혼령의 소리가 중요하다고 한다면  소리를 그쪽으로 향하게 만든  주최자는 누구일까에 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소리와 이미지가 영화에서 별개로 움직인다면 사운드 쇼트나 사운드 시퀀스는 어떻게 구분을 지어야 할 것인가. 이 무거운 주제에 대해 영화는 그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지만,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에 소리가 계속되는 장면에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영화에서의 소리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영화 안의 벽 너머로 들리는 소리일 뿐 아니라 영화 밖 제4의 벽 너머로도  들려오는 소리이다.  과거에서만 머물지 않고 지금 현재 '세계'라는 울타리를 향해 들려오는 소리인 것이다. 그 소리는 관객을 거쳐 영화 안으로 뻗어간다. 영화의 디제시스와 사운드가 싱크가 맞지 않는 이유도 우리가 '인지'를 계속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소리의 운동은 일방향이 아닌 사방으로 퍼지는 '파장'의 운동임을 기억하자. 그런 소리의 운동이 의식과 무의식, 파시즘과 희생자, 영화와 관객, 현재와 과거, 예술과 현실의 '벽'들을 통과하고 부딪치며 반사될 때,   과연 우리의 위치도 벽 '밖'이라고 지칭할 수가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질문에 영화의 소리를 단순히 나치를 향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벽을 통해 경계는 나눌 수는 있어도  어느 쪽에서  시점이 존재하느냐에 (혹은 어디서 보느냐) 따라 안과 밖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객은 단 한 번도 아우슈비츠의 위치에서 회스의 별장을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제4의 벽 너머 우리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시간을 초월한 거대한 알림음이며, 필자는 이 때문에 회스를 향한 카메라 시점이 아니라 소리의 시점 즉 청점으로서 영화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나단은 이 청점으로 안과 밖을 무력화시키고,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에서 과거로 인지하여 볼 수 있는 초월자로의 자세를 요구한다. (혹은 현존재) 'Build that wall '의 시대에   관객으로서 언제나 쉽지가 않다. 그래도 조나단 글레이저는 아우슈비츠의 벽뿐 아니라 인간이 쌓고 있는 벽의 행태, 가자 지구를 보았다. 소리의 진원지를 과거로 생각하는 자와 소리가 지금도 들린다고 말하는 자의 차이가 벽을 세우려고 하는 미국인의 시상식인 오스카에서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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