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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봄 Apr 17. 2022

모든 글은 저마다 절실한 이유가 있다

그토록 ‘치유적’이라는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

하늘은 복 없는 사람을 내리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자라게 하지 않는다.

《명심보감》 성심편


출판사에서 근무할 때 종종 이름 모를 필자들의 두꺼운 원고 뭉치를 받곤 했다.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썼다는 간절한 편지와 함께 보내온 원고는 대부분 내 책상 서랍의 가장 깊숙한 곳에 고이 모셔져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져갔다.


“내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열 권으로도 모자랄 거야” 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던 내 어머니 세대 여성들을 살아오면서 많이 만났다. 그럴 때 나는 상투적인 신파 유행어를 듣는 기분으로 슬몃 웃기도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죄송하고 가슴 아프고 또 아쉽기도 하다.


지난한 삶을 살았던 그때 그 익명의 필자들, 그가 누구였든 온몸으로 썼을 그 글을 진심으로 읽어볼 걸 그랬다. 열 권의 소설로도 모자랄 거라던 그 한숨 같은 여성들의 이야기에도 더 귀 기울일 걸 그랬다.


글쓰기와 말하기가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에게 그토록 ‘치유적’이라는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리고 이 세상 그 어떤 글도 함부로 취급해도 될 만큼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들의 글과 이야기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고통을 갖고 있으며 그 고통으로 인해 어떤 인생을 살게 됐는가, 그 긴 글을 무슨 심정으로 썼으며 글을 쓴 후에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 인간이 고난으로 점철된 삶에 맞서거나 그것을 받아들일 때는 또 어떤 모습인가.......


그때, 출판을 거절해야 한다는 부담감, 귀찮은 일을 떠맡은 것에 대한 짜증 없이 진솔한 마음으로 필자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약간의 시간을 내서 그의 글을 읽고, 직접 만나서 글로 기록된 그의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당신의 인생에서 내가 느낌 점은 이랬노라'고 솔직하면서도 따뜻한 말을 건넸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출판은 어렵겠다고 말했다 한들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것이다.


나의 수행을 지도해주던 스승님 한 분은 기도하거나 명상하는 제자들 앞에서 종종 트로트 가요를 구성지게 부르곤 하셨다. 인간의 내면엔 신파나 트로트에 공명하는 부분도 있다는 게 그분의 주장이었다. 내면에 뭉친 인간적인 한을 풀어내는 데는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나 명상 음악보다는 대중적인 트로트가 특효라는 것이다. 그때는 좀 낯설고 민망하기도 했는데 살면서 더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클래식이나 록 음악이나 트로트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트로트를 들어야 위로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내면엔 클래식 음악도, 록 음악도, 그리고 트로트적인 요소도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내면의 신파를 위로하기 위해선 신파의 감수성을 가진 음악과 영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에 발표된 작가들의 글에 대해서도 등급을 매겨가며 이러니저러니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유명세

에 비해 천박하다거나 수준 이하의 작품이라 실망했다는 뒷말과 비평도 종종 접하게 된다. 혹자는 상업성으로 포장된 얄팍한 내용에 열광하는 독자들의 맹목성을 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유 없이 인기를 끄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내면의 유치함이나 신파의 심정을 건드리

고 대변해줬기 때문에 거기에 열광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드러내고 풀어내야 할 것은 고상하고 지고한 것들보다 유치하거나 어두운 것들 혹은 신파인지 모른다.



이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글은 없다


이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글은 없다. 실제로 글은 모두 제 몫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글은 인간 내

면의 가장 높은 차원을 건드리지만, 우리 안에 숨은 어두운 측면이 활성화되도록 부추기는 글도 있다. 어떤 글은 대중매체를 떠들썩하게 하거나 ‘불후의 고전’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고 오랜 시기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또 어떤 글은 글쓴이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쓰였다가 조용히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누군가에게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보다 자신이 쓴 낙서가 더 절실하게 자신의 고통을 위로해줄 것이다.


글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사람을 위해 자기 역할을 다한다. 어떤 글이든 그렇다. 미완성의 토막글, 수첩 한 귀퉁이에 쓰인 단말마의 한 구절, 아이들 연습장의 욕설, 오늘 할 일의 목록, 하다못해 누군가의 연락처를 적은 메모까지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 글이 읽힌다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어떤 깨달음이나 감동, 공감, 이해, 또는 반대로 불편함과 분노를 일으켜서라도 말이다.


이처럼 그 어떤 글이라도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치유적 글쓰기다. 길고 짧음에 상관

없이, 문학적 수준의 높고 낮음이나 지적인 정보의 많고적음에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에는 등급도 없다. 그러니 치유를 위한 글은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쓰면 된다.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단어의 나열이라도 상관없다. 유난히 생각나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왜 내가 거기에 걸려 있을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듯 자신이 쓴 글도 수치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수치심은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로부터 온다고 했던가. 그러나 이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글이 없다는 나의 주장에 한 번만이라도 귀 기울인다면 그 글의 부족함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떤 존재 이유를 갖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_ 박미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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