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인터넷상에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카톡 내용이 있었다. 어린 학생이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며 '보고 싶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번호로 새로 개통한 분이 (고맙게도) 마치 그 학생의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보낸 것처럼 "아빠도 정말 보고 싶고, 사랑해. 아빠는 여기 잘 있으니까, 엄마랑 행복하게 잘 살고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라며 답장을 해 준 것이다.
<산티아고에서 온 편지>(강진숙, 이산들 지음, 물음 책방, 2020. 딸 이산들씨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엄마 강진숙씨와 주고받은 편지 형식의 책)에도 아빠를 하늘나라에 보낸 엄마와 딸의 이야기가 있다.
어린 나이에 아빠를 하늘나라로 보낸 산들씨도 산티아고 길에서 처음 만난 순례객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고 말하자,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나도 가끔 여든 넘어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일이 생각나면 눈물 날 때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는 코로나 초기라 병원 면회가 전면 금지된 시기였다. 입원도 거의 하신 적 없이, 여든 넘게 건강하게 사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병원에서 가족들의 얼굴도 잘 보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가셔야만 했다. 셋이 가서 먹었던 식당에 엄마와 둘이 가서 먹고 나올 때면 아버지가 "다음에는 옆에 오리 고기 식당에 가자, 먹어봤는데 맛있더라"하고 하셨던 말을 꺼내게 된다.
그래서일까? 산들씨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과 산들씨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고민을 안고 인생길을 걷고 있는 산들씨에게 아빠가 옆에 계셨다면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으실까? 짐작건대 이런 말이 아닐까 싶어 내가 산들씨의 아빠가 된 것처럼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어린 학생에게 하늘나라에 있는 아빠라고 카톡 답장을 해 준 그 분처럼, 흔들리며 피는 청춘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책을 읽고 쓰는 편지
▲ 산티아고에서 온 편지 표지 ⓒ 물음책방
산들아, 엄마와 함께 만든 책 '산티아고에서 온 편지' 아빠도 잘 읽었어. 그즈음 전공 공부를 3년이나 했는데, 그 길로 계속 가면 너의 30대가 너무 깜깜할 것 같은 불안감에, 혼자서라도 산티아고 길을 걸을 결심을 한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아.
긴 인생을 살아가는데, 각각의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잖아. 고민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갔다가, 또 뒤로 물러나야 할 때는 의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한 걸음의 의미를 잘 새겨둔다면, 그게 어디로 향하는 발걸음이든 아빠는 너를 응원해.
그래서 아빠는 네가 전공을 바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때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 그렇잖아? 당시 전공으로는 너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며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도 대단한데, 들인 시간이 아깝다며 어쩔 수 없이 끌려가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 거니까.
어디서 그런 통찰과 용기가 나온 건지, 엄마를 닮아서겠거니 싶으면서 또 아빠도 산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왔다면 행복할 것 같아.
더 많이 감사하고 즐기길 바라며
▲ 산티아고 순례길 어디든 노란 조개껍데기 이정표가 순례객을 맞는 길로 안내한다.ⓒ pixabay
산티아고 길을 걷고 온 이후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산들이는 아직도 20대니까 아빠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간을 걷고 있는 산들이가 좋아보여.
사람들은 말이야, 나이가 들어서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다들 비슷한 말을 하는 거 아니?
"너는 잘하고 있어. 그리고 잘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즐겁게 살아. 나중에 안 그래도 됐는데 괜히 즐기지 못했다고 후회하거든. 하하하."
비슷한 경험, 산들이도 있었지? 산들이가 산티아고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알베르게(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여행자들의 숙소)에 가면 늘 보게 되는 지침서 한 구절에 관한 이야기. 길을 걷는 순례자가 가져야 할 자세를 알려주는 작은 책자에 예외 없이 "늘 감사해라"라는 말이 적혀 있다고.
거길 온 사람들은 인생에서 해결해야 할 무엇인가를 안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각자의 고민을 잔뜩 집어넣어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800km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감사가 나오겠냐고 했지. 하지만 그 길을 다 걷고 난 다음 너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잖아.
'이제는 정말 모두에게 감사해. 많은 여행을 했지만 ,이토록 내가 소중히 여겨지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결국 어떤 길이든 걷는 그 순간은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그때 더 많이 감사해 하고 즐거워 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니? 그리고 그런 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도.
물론 이 책을 한창 만들던 때 코로나와 맞물려 취직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대학만 졸업하면 너만의 커리어를 멋지게 쌓아갈 줄 알았는데 이래저래 생각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시간이 다시 찾아왔지만.
하지만 산들아, 산티아고 길을 걷고 난 다음 달라졌던 너의 모습, 산들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고는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인 그 경험은,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올 때마다 분명 너를 일으켜 세워 줄 거야.
현실에 파묻혀 잊고 있었지만, 마음속 어느 서랍 안에 잘 넣어둔 보석처럼 또 한 번 너를 반짝이게 해 줄 거로 생각해.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맞아, 나 산티아고 길 걷고 나서 그랬어. 내가 얼마나 멋지고 소중한 사람인지 깨달았지' 했던 그 기억을 꺼내 보며, 지금 더 즐겁게 살길 바란다.
책 제목 옆에 적혀 있는 글, 엄마가 너에게 하는 말을 아빠도 똑같이 해 주고 싶어. 산들이가 만날 미래의 수많은 시작을 응원한다고.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좋은 곳도 많이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남자친구 사귀면 아빠한테도 소개해 주고, 엄마와도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마음만은 푹 담은 추억도 많이 만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