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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Aug 19. 2024

딸에게 남기는 나의 비각 (11)

몰투(沒投)

지난 편지에 인생이라는 바다를 행복하게 건너려면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했다. 오늘 편지에서는 인생의 바다를 행복하게 건너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을 말해 보려 한다. 그것은 바로 ‘나답게 사는 것’이다. 행복의 두 번째 열쇠는 바로 진정한 나를 찾아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가면을 쓴 채 가짜 나로 살게 되면 내 인생을 남에게 해석당하는 불행을 견뎌야 한다.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타인을 수단으로 여기고 나도 모르게 크던 작던 폭력을 가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본연의 내 모습을 바라볼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옛날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의 일부 부족들은 성인을 앞둔 아이를 혼자 산으로 보낸다고 한다. 혼자 움막을 짓고 그 안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며칠 동안 금식을 하면서 신의 계시를 기다린다고 한다. 신의 계시라 하지만 아이가 깨닫는 것은 자아의 발견이다.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산속에서 홀로 자연과 마주하며 자신의 질문의 대답을 구한 자만이 진정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애벌레도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 안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고독의 시간을 견디면서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준비한다. 나비는 고치 안에서 꿈을 꾼다. 앞으로 나갈 세상을 어떻게 여행할 것인가? 인간도 고치 안에서 자신만의 날개를 준비해야 한다.

 

고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늘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니 주체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다. 타인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다 정작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타인의 목소리에 마취되고 그 발자국만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관계의 지옥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만의 고독한 시간을 만들고 나를 초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하지 못하면 영혼을 빼앗긴 마리오네트의 신세가 된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만의 대답을 찾아야 한다. 남을 흉내 내는 삶은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신께서 인간을 세상으로 보낼 때 3천여 개의 달란트 중에 반드시 무엇인가를 같이 보낸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지상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그 달란트를 재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달란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만의 주어진 재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불빛으로 나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삶이라는 예술은 내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 이를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계발이다. 나의 달란트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를 찾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를 ‘몰입’이라고 한다. 어떤 일이 너무 즐거워서 그것에 푹 빠진 상태를 가리킨다. 완전히 집중하여 행동과 의식이 합쳐져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나 자신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를 말하며 이를 ‘무아지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아지경의 또 다른 뜻은 마음이 어느 한 곳으로 온통 쏠려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경지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이다. 러너스 하이는 마라톤과 같이 지속적인 운동을 할 때 몸 안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되면서 신체적 스트레스와 통증을 억제하며 발생하는 행복감을 말한다. 움직이는 발과 나의 구분이 없어지며 자아가 소멸되는 기분이 들면서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예술가들도 몰입을 자주 경험한다. 아름다움을 창조할 때 삶의 문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창조하는 행위와 내가 조화를 이루어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예술이 나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는다. 행복이란 재미와 의미가 동시에 발견되었을 때 느끼는 희열이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몰입이 되는지는 직접 도전해 보고 겪어봐야 알 수 있다. 다양한 도전과 경험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한다. 몰입의 대상을 찾는 것은 연애와 비슷하다. 사랑을 찾기 위해 헤매야 하듯 진정한 나의 몰입을 찾기 위해서는 연애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을 찾아 헤매야 한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주인공 마르코처럼 말이다.

 

몰입의 반대는 나태이다. 나태가 생기는 이유는 삶의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내 삶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연극이라는 무대가 주어졌는데 나의 스토리로 채우지 못할 때 나태가 발생한다. 나의 무대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못해도 인생이라는 공연은 시작되기에 일단 급한 대로 남의 이야기를 갖다 채워 넣는다. 남이 시킨 일을 하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니 재미가 없고 공허하다. 삶의 공허함은 결국 나태에서 비롯된다. 나태는 늪과도 같다. 처음에는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겠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된다. 그러면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한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포도를 먹지 못한 여우처럼 말이다. 환경을 탓하며 선택을 남에게 맡기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나태란 삶의 방향성과 동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나태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삶의 방향성을 다시 찾는 것이다. 즉 잃어버린 나의 이야기를 다시 찾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다시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통해 잃어버린 나의 북극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 나태는 삶의 에너지가 흩어진 상태이다. 오늘 나의 하루가 나라는 소설의 한 페이지가 되지 못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내 인생의 방향성과 비전을 가지고 오늘의 관계를 회복하면 나태를 극복할 수 있다. 가장 나답게 살 때 나의 이야기는 살아난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나태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결국 뇌의 문제이다. 나태가 생겼다는 것은 나의 뇌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태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에 대해서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도파민은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목표를 달성하고 성취감을 느끼면 도파민이 분비되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다음에도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려는 동기부여가 강화된다. 도파민은 더! 더!! 더!!! 를 외치는 욕심쟁이 호르몬이다.


뇌에 의욕이 생기게 하려면 보상을 줘야 한다. 보상을 얻은 뇌는 다음에 더 많은 보상을 얻기 위해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연구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강화 학습’이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이 발달하는 것도 이러한 도파민 시스템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파민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명확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도파민은 상상력의 호르몬이다. 도파민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도 분비되지만 목표를 세울 때부터 분비된다. 목표를 세울 때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멀고 불투명한 목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상을 하지 못하면 공상에 그치고 만다. 단기간에 이룰 수 있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10년 후 목표보다는 한 달, 일주일, 하루씩 이런 식으로 단기 목표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로마 제국은 건설한 도로에 1마일당 1개씩의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마일스톤 milestone'이라 한다. 현재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목적지까지의 남은 거리와 방향을 새겨놓은 표지석을 의미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다. 마라톤 경기할 때 45.195km의 결승점만 생각하면 너무 멀게 느껴지지만 1km, 5km, 10km 갈 때마다 표시된 마일스톤을 보면 작은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완주할 수 있게 된다.


목표 중간중간에 마일 스톤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마일 스톤에 도달했을 때 뇌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욕심 많은 뇌는 또 보상을 받으려고 도파민을 더 많이 분비한다. 예를 들어 네가 세운 한 주의 계획을 달성했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선물을 사주는 등의 너의 뇌를 위한 보상 이벤트가 필요하다. 롤플레잉 게임에 이런 도파민 시스템이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다. 적당한 난이도의 마일 스톤이 계속 놓여 있고 그 마일 스톤을 획득할 때마다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도파민 시스템이 돌아가면서 게임을 그만둘 수가 없게 된다.


목표를 달성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자주 상상해야 한다. 우리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공포 영화를 볼 때 무서움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면에 나타난 귀신이 실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 몸은 마치 진짜 귀신을 본 것 같은 반응을 일으킨다. 신 레몬을 먹는다고 상상하면 입 안에 침이 고이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신 레몬을 먹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똑같이 활성화된다.


목표를 이루었다고 상상하면 뇌는 착각하여 도파민을 분비시킨다. 뇌가 확실하게(?) 착각하기 위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도파민을 미래로 보내 미리 체험을 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학하고 싶은 대학이 있다면 실제로 그 대학에 합격했다고 구체적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합격 통지를 받은 것처럼 기뻐하고 학교 교정을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가족과 친구들과 축하 파티도 열고 기쁨의 시간들을 만끽하는 장면도 떠올려 본다. 강의를 들으며 멋진 남자 친구도 만나는 상상도 해본다.(이미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배낭여행도 다니고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 내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렇게 미래를 체험하고 온 도파민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미래에서 오늘을 바라보라. 그리고 다시 오늘에서 미래로 바라보라. 내 인생의 소설을 미리 써보는 것도 좋다. 오늘도 인생이라는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책장이 넘어가고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위해 오늘 필요한 페이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페이지를 위해 하루하루를 연결하는 것이다. 해피엔딩을 위해 필요한 오늘의 페이지를 내 몸으로 쓰는 것이 인생이다.

 

너의 미래를 기억하라! 미래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 그렇게 믿으면 도파민도 자주 분출되어 너의 목표를 이루게 해 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목표를 확인하고 상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도파민은 금세 사라지지 때문에 목표를 자주 확인해야 한다. 도파민에게도 매끼마다 밥을 줘야 한다.


목표를 세워 놓고도 이 길이 정말 나의 길이 맞는지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나의 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받기 위해 남의 목표를 따라가는 중일 지도 모른다. 가짜 목표는 두려움을 안겨 준다. 두려움은 나의 목표가 가짜라는 명징한 증거이다.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회피와 변명을 생산하며 나의 기차를 인생길에서 탈선시킨다. 하지만 역사가 설명해 준다. 모든 위인은 두려움이라는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이루어낸 성취는 그들이 통과했던 역경의 길이와 비례한다고.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역경의 터널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간헐적인 성공은 지속적인 패배의 터널 끝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견디는 능력이다.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인생의 갈림길은 단지 두 가지였다. 포기할 것인가? 견딜 것인가? 난 부끄럽게도 늘 포기의 선택을 했었다. 이제는 너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견디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감정의 그림자일 뿐임을.


나태를 벗어나는 길은 나의 이야기를 다시 찾는 것이다. 방황으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을 가장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몰입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몰입하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다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몰입의 대상을 찾았다면 이는 다시 태어난 것도 같다. 잃어버린 나의 달란트를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비로소 마리오네트의 삶을 벗어나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은 가장 나다운 몰입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 가혹한 이유는 어느 날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내던져진 존재였던 것이다. 더더구나 내가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원하지 않은 나라에, 부모의 자식으로, 성별로, 외모로 던져졌다. 인간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내던져진, 부조리로 가득 찬 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면 살지 않을 것인가? 햄릿의 말대로 죽느냐, 사느냐 늘 이것이 문제다.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를 뾰족한 산꼭대기까지 올려놓아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를 뾰족한 산꼭대기에 세우는 순간 바위는 그 무게로 인해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떨어진 바위를 다시 산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또다시 굴러 떨어지고,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이렇게 시지프스는 무한 반복되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영원한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는 고민했을 것이다. 이 무간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살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의 저서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강렬하게 느껴진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뮈는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오는 그 순간이야말로 시지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이기는 승리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슬픔과 절망에 빠지지 않고 신들이 정해준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며 산 밑으로 웃으면서 내려오는 인간 시지프스는 보란 듯이 그 바위를 다시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린다.

 

시지프스도 이 지겨운 형벌을 이겨내기 위해 ‘몰입’을 깨우쳤을 것이다. “어차피 해야 되는 거 이왕이면 즐겁게 하자!! 어떻게 하면 바위를 재미있게 올릴 수 있을까? 이번에는 지난번의 기록을 깨어 볼까? 어제는 앞으로 밀었는데 오늘은 뒤로 밀어볼까? 바위 밀어 올리기는 참 좋은 운동 같아.” 이렇게 몰입하여 무아지경에 빠지는 순간 형벌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게 된다. 무의미하고 영원한 형벌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재미있는 놀이로 ‘승화’시킨 시지프스를 보고 제우스는 더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몰입'은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행복한 반항인 것이다. 시지프스는 산 밑으로 내려올 때 고은의 시도 낭송했을 것 같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리고 제우스를 향해 포효했을 것이다. “나는 몰입한다!! 고로 존재한다!!!”


주어진 조건에 굴복하지 않고 넘어서는 것을 야스퍼스는 ‘자기 초월’이라 말했고 니체는 ‘초인’이라 불렀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를 세상에 던진 신에게 어떤 드라마를 보여줄 것인가? 던져진 하루들이 쌓여 나의 인생이 된다. 피투(彼投)에서 기투(企投)로! 나를 세상으로 던진 신에게 다시 몰입으로 기투하자. 나를 이것을 몰투(沒投)라 부르겠다. 누적된 몰입만큼 행복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행복한 21세기 시지프스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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