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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동범 Mar 12. 2023

비건이라는 삶

픽션 에세이_보통의 식탁_03






오늘은 친구들이 당신의 집을 방문하는 날이다. 서울을 떠나 인근의 도시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마음 한구석에는 그 어떤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서울을 떠난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당신에게 서울을 떠난다는 것은 마치 변방으로 밀려나는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심과 변방이라는 구분이 지극히 일방적인 판단 기준임을 당신은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의 이주는 단지 삶의 거처를 옮기는 것일 뿐이었다.


당신이 만드는 음식은 비건을 위한 특별한 음식이지만,
사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기도 하다.


당신은 친구들을 위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시장에 가기로 한다. 당신은 메모지에 음식 목록을 적고 구입해야 할 식재료도 꼼꼼히 기록한다. 그런데 당신이 메모지에 기록한 식재료는 모두 채소뿐이다. 당신이 만들려는 파스타와 샐러드, 커리와 샌드위치, 그라탱과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는 식물성 재료만 들어간다. 당신은 빵과 함께 먹을 소스와 잼도 식물성 재료로 만들어진 것만을 고른다. 당신은 이십 대 이후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지 고기만 먹지 않았지만 이후에 완전히 채식만을 하는 비건이 되었다.


Ⓒpixabay


당신은 비건이다. 따라서 육류는 물론이고 생선, 달걀, 동물성 기름 등도 먹지 않는다. 실크나 가죽으로 만든 제품 역시 사용하지 않는다. 당신은 오로지 채소만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하며 식물성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당신은 환경과 생태에 반하는 동물성 식품과 제품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은 비건이 아닌 사람들의 취향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당신과 같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억지로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또한 오로지 채식만이 윤리적이라는 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당신은 그저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육식으로 인한 폭력적인 상황을 깨닫고 환경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은 집 앞 시장에 가서 적어간 식재료를 찬찬히 고른다. 하지만 시장에서 살 만한 물건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윤리적인 환경에서 재배했거나 비건 음식에 적합한 식재료를 일반 상점에서 구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당신은 한두 주에 한 번 정도 비건 식재료를 판매하는 상점에 가거나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한다. 오늘 만들 음식 재료 역시 대부분 준비되어 있다. 당신은 채소와 과일 등속을 고른 다음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pixabay


친구들이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여유롭기 때문에 당신은 천천히 요리를 준비한다. 당신은 집으로 와줄 친구들에게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든다. 비건이 아닌 사람들과 외부에서 만나는 일은 여러 불편함이 따른다. 당신은 여러 사람과 함께 모이는 회식 자리나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회식은 대부분 고깃집이나 횟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건인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한정되어 있다. 


당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샐러드를 만들고 면을 삶고 케이크를 만든다. 당신이 만드는 음식은 비건을 위한 특별한 음식이지만, 사실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음식이기도 하다. 당신이 만드는 음식에는 그저 육류를 비롯한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재료를 선택하는 문제일 뿐이다. 비건은 특별한 음식을 먹는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을 할 뿐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파를 먹지 않거나 시금치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느새 당신의 식탁은 행복하고 건강한 한 끼 식사로 풍요로워진다. 이제 곧 친구들이 당도하겠지. 당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 해를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조동범, <보통의 식탁>(알마, 2018) 중에서







조동범

매일매일 읽고 쓰며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이다.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은 이후 몇 권의 책을 낸 시인이자 작가이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실천하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문학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이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연구상, 미네르바작품상, 딩아돌하작품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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