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_석모도 카페 <순간의 순간>
비건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비건이라는 말은 베지테리언을 통칭하는 단어처럼 쓰인다. 하지만 비건은 채식주의자인 베지테리언 중에서 완전한 채식을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베지테리언은 비건 이외에도 생선, 계란, 유제품 등의 섭취 여부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하지만 비건이든 아니든 베지테리언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의지는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이 채식을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일 테지만 베지테리언이 지향하는 실천적 의지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베지테리언을 절대선이라고 할 수도, 육식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과 환경 등을 생각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는 삶은 분명 의미 있다.
나는 비건은 아니지만 이따금 비건 카페와 비건 식당에 간다. 비건식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그곳들이 품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도 좋아한다. 비건도 베지테리언도 아니지만 한 끼 식사를 통해 삶과 욕망에 대한 반성적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즐겁고 행복하다. 어쩌다 한 번 비건 카페나 식당에 가는 것이 전부지만 그들의 실천적 행동과 의지를 함께 고민하고 지지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건 또는 베지테리언이라는 단어는 그것의 지향 의지로 인하여 인간의 욕망이나 파괴 등과 반대의 감각을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비건이나 베지테리언이라는 말은 도시나 인공보다 자연과 더 강한 친화력을 보인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건 카페와 식당은 자연 한가운데가 아니라 도심에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비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지 않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한가운데 아름답게 자리한 비건 카페와 식당을 상상해 보지만 실제로 그런 곳을 찾기는 어렵다. 더구나 자연이라는 공간의 어느 극단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북극권인 알래스카의 땅끝마을 호머 같은 곳에도 비건 레스토랑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도심 이외의 지역에서 비건 카페와 식당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 가운데 서해 석모도 서편 끝에 있는 비건 카페 ‘순간의 순간’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카페 ‘순간의 순간’까지 가는 길은 익숙한 듯 멀다. 우리에게 익숙한 김포와 강화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석모도 서편 끝에 있기 때문에 ‘순간의 순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섬 너머의 섬이지만 자동차로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심정적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섬과 섬 너머 먼바다를 품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멀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 속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는 비건 카페 ‘순간의 순간’은 그 어느 곳보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섬의 서편 끝에서 서해 먼바다를 품고 있는 ‘순간의 순간’. 이곳은 비건 메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논비건 옵션도 가능하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비건 지향 카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료는 물론이고 케이크를 비롯한 디저트까지 비건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메뉴는 비건인 이곳 사장님이 직접 만든다. ‘순간의 순간’은 오랫동안 서울 합정동에서 비건 카페 ‘쿡앤북’을 운영하던 분이 석모도 고향집으로 돌아와 문을 연 곳이다. 합정동에서 이곳 석모도 끝 편으로 자리를 옮긴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바다와 비건을 품고 있는, ‘순간의 순간’이라는 시·공간은 너무나 커다란 울림이자 매혹이다.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온 비건 카페는 대부분 도시에 있다. 그리고 비건 카페를 생각하면 왠지 젊음, 핫플레이스, 힙타운 등의 단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비건 카페를 운영하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이 젊은 계층에 한정되어 있다거나 유행에 민감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비건 카페나 식당이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고, 젊은 층이 비건과 베지테리언에 적극적인 실천 의지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한적한 섬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순간의 순간’은 어떤 면에서 낯설기도 하다. 그러나 비건이 지향하는 선한 의지와 석모도 바다는 무척이나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순간의 순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언제나 물의 일렁임으로 가득하다. 바다를 향해 있는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순간의 순간’에 앉아 있노라면 바다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서해 갯벌 특유의 눅진함보다 일렁임으로 충만한 물의 감각이 도드라진다. 밀물과 썰물이 선명하게 교차하지 않기에 언제나 가득 차오른 바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해나 남해의 청명함이 주는 것과는 다른, 고요하게 침잠하는 느낌의 바다이다. 서해의 먼, 석모도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평화가 차분하게 깃드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 비건을 위한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는 시간은 이러한 바다의 감각과 연결되며 고단한 삶으로부터 놓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섬 속의 섬 그 끝에 비건 카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런 낯선 모습은 어색함으로 다가오기보다 신선함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자연의 한가운데 있는 비건 카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만 보아왔다. 그리고 그런 것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 왔다. ‘순간의 순간’은 고정관념과 일상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일깨우는 공간이다. 그리고 비건이라는 지향이 서해 먼바다의 일렁임과 만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서편 바다 끝에 자리 잡은 비건 카페 ‘순간의 순간’은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이 되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이 글은 월간 <해군> 2022년 4월호에도 수록되었습니다.
카페 <순간의 순간>
주소: 경기도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 990(석모도)
전화: 0507-1417-6990
매주 월요일, 화요일 정기휴무
조동범
매일매일 읽고 쓰며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이다.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은 이후 몇 권의 책을 낸 시인이자 작가이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실천하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문학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이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연구상, 미네르바작품상, 딩아돌하작품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