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_04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로 가는 길은 멀었다. 8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어야 했는데 마트에 들러 이런저런 물건을 사느라 출발이 늦어졌다. 특별히 살 것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앵커리지의 대형 마트에 들러 페어뱅크스로 가는 동안 먹을 음료와 샌드위치 등을 샀다. 앵커리지의 마트는 우리나라의 마트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미국 도시의 대형 매장과도 다른 점이 있었는데, 캠핑용품의 종류가 무척 다채롭다는 점과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총을 판매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로 가는 여정은
원시의 자연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권총부터 사냥용 장총에 이르기까지, 총의 종류는 나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내가 낯설게 느낀 것은 다양한 종류의 총을 판매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총기 소지가 보편화된 미국에서 총을 판매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내가 낯선 이물감을 느꼈던 것은 총을 아이들 장남감처럼 진열해놓고 파는 방식이었다. 그들에게 총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일상생활 한가운데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생필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가의, 그야말로 총 다운 총보다 장난감처럼 작고 가벼운 총을 보았을 때 그 어떤 섬뜩함을 느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총과는 거리가 먼 느낌의 총을 보자 한없이 가벼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떠올랐고, 삶과 죽음의 가벼움과 덧없음에 섬뜩함을 느꼈다.
이르지 않은 오전에 출발하여 타키트나를 거쳐 페어뱅크스를 가는 여정이어서 도착 시간이 다소 걱정이 되었다. 타키트나 경비행기 투어 예약까지 해놓은 상황이라 자정 이후에나 페어뱅크스에 도착할 것 같았다. 오전에 출발하여 타키트나에서 데날리(매킨리) 빙하랜딩 투어를 마치자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타키트나는 데날리(매킨리) 빙하랜딩 투어를 위해 알래스카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여행자가 찾는 곳이다. 타키트나는 작은 규모의 마을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정겨운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나는 여느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타키트나의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곁들인 피자와 스파게티로 점심 식사를 했다. 그 이후에 인상적인 빙하랜딩 투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페어뱅크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같은 북미 지역에 있는 캐나디언 로키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었다. 캐나디언 로키가 식물 생장선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높이의 아름다움이라면, 알래스카는 광활한 들판이 보여주는 넓이의 아름다움이었다. 두 곳 모두 자연의 경이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캐나디언 로키의 숲과 빙하호의 아름다운 색감의 경우 환상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반면, 알래스카의 숲과 들판과 빙하와 강물은 거친 느낌이 더 강렬했다. 알래스카의 숲과 들판과 빙하와 강물 역시 초록과 흰색이 전달하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채색의 거친 감각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특히 알래스카의 거칠게 흐르는 무채색의 강물은 로키산맥의 정적인 호수의 화려함에 비해 원시성을 더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로 가는 여정은 바로 그러한 원시의 자연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캐나디언 로키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언뜻 느끼기에 이러한 알래스카의 자연의 미적 아름다움에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래스카의 자연을 캐나디언 로키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각각의 매력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래스카의 자연이 전달하는 원시성이야말로 우리가 북극권으로 떠난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곳은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곳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야성과 한발 더 가까이 있는 세계이다. 우리가 알래스카로 떠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야성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나는 야성의 자연 앞에 압도당하며 페어뱅크스까지의 긴 여정을 달려가고 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온전히 혼자임을 느끼고 거대한 두려움마저 느끼곤 하였다. 길은 끝도 없이 뻗어있고 들판과 먼 산의 빙하를 배경으로 두른 자작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숲은 그 어떤 신비를 품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것은 조림사업을 한 숲의 충만한 초록과는 다른 느낌이다. 들판과 교차하며 거칠게 전개되는 자작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숲은 알래스카의 야성과 맞닿아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끝없는 길 위에 놓인 나의 삶은 보잘것없이 느껴지고, 길의 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과연 이 길 너머 저 먼 곳에 내가 보고자 하는 알래스카의 그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 길의 끝에 어쩌면 지상의 세계가 담을 수 없는 신비와 환영이 가득한 것은 아닐까?
알래스카에 도착한 첫날 앵커리지에서 마주한 백야가 하나의 장소에서 마주한 정적인 백야라면 다음 날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로 이동하며 맞닥뜨린 백야는 흘러가는 강물처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며 나의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 백야를 관통하며 달리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따라 자작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숲은 출렁였고 어둠이 장악하지 못한 빛은 흐느적거리며 하늘과 지상의 모든 곳에 밤의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앵커리지를 출발하여 타키트나를 거쳐 페어뱅크스로 가는 길은 멀고 아득했다. 그러나 페어뱅크스까지의 머나 먼 여정의 아득함은 지루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과 길게 이어진 도로는 매순간 비슷한 풍경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같은 것들이 반복되며 나타나는 지루함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었다.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압도하며 펼쳐진 자연은 그것 자체로 거대한 서사였으며 깊이 있는 울림과 감동이었다.
그 사이에 백야는 펼쳐졌고, 백야의 빛이 신기루처럼
자작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숲 그리고 지평선의 저 끝까지 배회하고 있었다.
타키트나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출발한 탓에 저녁을 지나 밤이 되어도 페어뱅크스는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그 사이에 백야는 펼쳐졌고, 백야의 빛이 신기루처럼 자작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숲 그리고 지평선의 저 끝까지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빛의 향연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연한 빛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은 어둠 역시 아니었다. 마치 숲과 들판의 음성이 들리는 듯 환영처럼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백야의 세계는 펼쳐졌다. 하늘과 지상은 구분하기 힘든 색감으로 하나가 되었고 자작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숲은 혼곤한 빛을 등에 지고 어둠처럼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갔다.
백야의 들판. 그것을 무슨 색이라 해야 할까. 흰빛도 회색빛도 푸른빛도 아닌 백야의 공중은 마치 혼곤한 잠처럼 지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로 가는 여정의 백야를 떠올리면 그것은 몽롱한 잠에 빠져드는 것만 같은, 몽환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의 공간감. 백야는 밤에 펼쳐진다는 점에서 시간의 개념이지만 빛이 만들어내는 몽롱한 이미지로 인해 공간의 양상으로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그런 점에서 백야는 단순히 환한 어둠이거나 밤이 아니다. 백야는 어둠 속에 숨어 있어야 할 것들을 우리의 눈앞에 호명하며 그것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사물의 모습은 기존의 모습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낯선 감각으로 다가온다.
조동범
매일매일 읽고 쓰며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이다.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은 이후 몇 권의 책을 낸 시인이자 작가이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실천하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문학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이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연구상, 미네르바작품상, 딩아돌하작품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