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인천에서 싱가포르, 그리고 발리까지
9시 50분. 스쿠트 항공의 비행기가 발리 응우라라이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23시 45분에 싱가포르 항공을 탄 이후로 시차 1시간까지 계산하면 대략 11시간 정도가 걸렸다. 제법 스펙타클한 여정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출국을 앞두고 공항에 들어섰을 때 아닐까.
특히 무거운 캐리어를 수하물로 보내버리고 한결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입국 데스크를 넘어가면 있는 면세점 쇼핑은 이걸 위해 여행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나는 이전 인도네시아 어학연수, 대만 여행 총 2번의 해외 출국을 할 때 한 번도 면세점 쇼핑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첫 번째 출국 때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우왕좌왕 하다가 친구와 정신없이 냅다 비행기를 탔었고, 두 번째 출국 때에는 혼자 출국을 했기 때문에 내심 멋진 면세 쇼핑을 기대했으나 비행 시간이 너무 일렀다. 거의 새벽 4-5시에 공항버스를 타고 이동했음에도 놓치지만 않을 정도의 텀을 두고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번 다 면세점 쇼핑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보니 이번 세 번째 출국은 내심 기대를 하였으나, 면세점은 나와 인연이 영 아닌지 역시나 또 실패했다. 면세점은 생각보다 일찍 문을 닫더라. 마감 시간 21시 30분, 그리고 내 비행시간은 23시 45분. 조금 일찍 들어가려고 해도 수하물 보내는 게 3시간 전에 열려서 짐 부치고 탑승수속 하고 들어가니 문을 다 닫아서 아쉬웠다.
같이 여행 가는 친구랑 차라리 밥 먹지 말고 수하물 줄 섰다가 일찍 들어가서 구경할 걸 그랬나 했지만, 그래도 공항 도착해서 먹은 순두부찌개가 너무 맛있었어서 후회는 없다.
아, 그리고 바보같은 짓 해서 멍청비용 쓴 게 어이없어서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귀가 정말 안 좋아서 비행기 이착륙 시에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그래서 항상 미리 이비인후과에 들려서 약을 처방받아서 타기 전에 먹고 타야 하는데, 수하물 보내고 탑승수속 하러 가다가 번뜩 깨달았다. 아, 약 캐리어에 두고 왔다. 이렇게 바보 같을수가.
부랴부랴 약국에서 귀 아플 때 먹는 약을 물어봐서 새로 샀는데, 2만원이 들었다. 세상.. 약은 아르기니 포르테랑 메모빅 두 가지 였는데 초면이지만 이렇게 비싼 약이었니 너희들.
여행 전부터 이렇게 멍청비용 썼다는 사실이 너무 바보같고 아까웠지만, 이걸로 여행의 들뜬 기분을 망칠 수는 없어서 얼른 잊었다. 빈속에 약을 먹을 수가 없어서 그래놀라 프로틴바를 하나 사서 먹었는데 아직도 너무 맛있어서 생각난다. 쿠팡에서 대량 구매 주문 예정.
면세점도 편의점도 식당도 모두 문을 닫아서 무한 대기를 하다가 드디어 탑승했다.
비행기는 코로나 전 2020년 대만여행 이후로 거의 4년 만이라 너무 설레고 실감도 안 났다. 게다가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경유를 하는 데다가, 거의 11시간 이라는 최장시간 비행이기에 긴장도 됐다.
내가 탔던 비행기 경로는 인천에서 싱가포르까지 5-6시간 정도 싱가포르 항공을 타고 이동해서 2시간 30분 가량 경유지에 머무른 뒤 싱가포르에서 발리까지 스쿠트 항공을 타고 2시간 정도 이동하는 경로였다. 처음에는 중간에 한 번 내릴 수 있으니 답답함은 덜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지 뭐람.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을 보면 알겠지만, 경유는 절대 비추다. 경유라서 좋았던 점은 기내식이 2번 나온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싱가포르 항공은 국적기라 그런지 비행기 내부나 시설이 굉장히 좋았다.
비행 시간이 짧지 않아서인지 좌석에 모니터가 내재되어 있었고 영화나 드라마도 최신이라 보기 좋았다. 국내 항공사가 아닌 만큼 한국어 자막은 없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싱가포르로 갈 때 기내식이 정말 맛있었는데, 밥이랑 반찬, 디저트까지 제법 푸짐하게 나왔다. 메뉴는 제육볶음 이었는데, 나는 메인보다도 에피타이저처럼 나온 모닝빵에 발라먹는 버터가 너무 맛있었어서 기억에 남는다. 심지어 버터 너무 귀엽게 들어가 있었음.
밥 먹고 나니까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져서 영화고 뭐고 냅다 숙면했다. 무릎도 못 펴는 좁은 공간에서 밥은 배불리 먹고 잠자니까 약간 사육 당하는 기분이 좀 들었다.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니 싱가포르였다. 오전 5시쯤 도착해서 비몽사몽한 상태고 밖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외국이라는 실감이 안 났다. 그리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가게 문을 아예 안 열어서 더 고요했다. 너무 피곤해서 친구랑 공항 의자에 쪼그리고 누워서 한 30분 정도 자다가 슬슬 면세점이랑 가게 문 열길래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공항에 큰 초콜렛 면세 가게가 있길래 구경하다가 추워서 2층에 있는 맥날에 핫초코라도 사먹자며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이 평화롭고 여유로운 상황이 깨진 건 그때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우연히 탑승보드를 봤는데, 우리가 타야 할 항공편에 라스트 콜이 떠 있었다.
이건 정말 조상신이 도왔다고밖엔 표현이 안 된다.
이걸 맥날 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발견 못했으면 그대로 비행기 놓칠 수도 있었던 거다. 일단 허둥지둥 달려가면서도 ‘원래 이륙 1시간 전부터 라스트 콜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뛰었다. 간신히 시간 세이프해서 들어가니 내가 타야 할 발리행 비행기는 이게 아니라 반대편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너무 놀라니까 영어도 안 나오더라.
어물어물 승무원처럼 보이는 분에게 질문하니까 비행기가 2개였는데, 우리가 비행기 번호를 착각해서 게이트랑 탑승구를 잘못 왔던 거였다. 식은땀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