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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쾌재 Apr 18. 2022

다섯손가락이 만나는 방법

오늘은 랜선 모임이 있는 날이다. 2년만의 만남이라 그런지 무척 설레고 궁금하다. 일찌감치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미리 주문한 치킨 한 마리와 가벼운 주류를 펼쳤다. 두 아이들이 가장 잘 보이도록 구도를 잡고 컴퓨터 모니터를 켰다. 아직은 아무도 접속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다.

   

잠시 후 약지네 가족이 접속을 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얘들아~안녕!”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약지네도 잘 지냈어요? 하선이, 하진이도 많이 컸네. 안녕!” 이렇게 인사를 주고받고 나니 검지네 가족이 접속을 했다. 그런데 가족이 서로 다른 곳에 있다. “어! 검지네는 함께 있는 게 아니네.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내가 묻는다. “아! 남편이 급한 일로 출장을 가서요.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네요. 여보, 안녕?”, “응, 집에 별일 없지?”

   

랜선 모임이다보니 나름 이런 재미도 있구나 싶다. 뒤이어 소지네 가족이 접속을 했다. 역시 안부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 중지네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각 가족들끼리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다. 접속하기로 한 시간이 좀 지났는데 여전히 중지네가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급하게 전화를 한다. “어이, 중지네! 왜 접속을 안하는거야? 다들 기다리고 있어.” 전화를 끊자 얼마 있지 않아 중지네가 접속을 했다. “다들 잘 지냈어요? 애들 돌보느라 깜빡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드디어 다섯 가족이 모두 접속을 완료했다.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이 되고 모임은 절정을 향해 달린다.

   

원래 이 모임은 내가 백수 시절의 후배들과 결혼 전부터 정기적으로 하던 것이었다. 백수 시절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사실 임용고사 준비를 하며 만난 후배들이다. 말이 임용고사지 우리 사이에서는 임용고시로 통한다. 다들 힘든 시절, 서로의 위안이 되어주고 응원하며 공부를 했던 사이라 남다른 끈끈함이 있다. 말 그대로 고시 공부다보니 재수 삼수는 기본이었다. 칠 수 끝에 합격한 친구가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

  

먼저 합격해 자리를 잡은 이들은 뒤에 남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합격할 때까지 함께 동행 했다. 나는 일찌감치 후배들에게 “야! 우리 결혼 후에도 이 모임은 그대로 하는 거다.  아예 가족모임으로 하면 더 좋고.”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결혼 후 문제는 서로의 배우자들이었다. 내 아내만 해도 벌써 “자기야! 그 모임 나도 꼭 가야해? 나 어색한 거 정말 싫은데...” 하며 내켜하지 않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모임은 꼭 나가야해. 일단 한번 가봐.” 결국 나의 고집에 못 이겨 아내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하지만 서로 말도 잘 통하고 배려해주는 분위기에 언제부턴가 아내도 이 모임을 기다리게 되었다. 중지네의 아이디어로 ‘다섯 손가락’이라는 모임 이름도 짓고 각 가족을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네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 청주, 전주, 부안, 순천 이렇게 사는 곳은 제각각이지만 일 년에 두 번씩 중간 지점을 정해 만나곤 했다.

   

그렇게 8년을 유지해온 모임,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면서 2년 동안 모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지네가 낸 묘안이 바로 랜선 모임이었다. 나는 처음 이 랜선 모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고 말을 해야지 화면 보면서 이야기한들 무슨 교감이 되겠냐며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제일 많은 꼰대의 진가를 제대로 보인 것이다.

   

아내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그래도 서로 얼굴 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막상 화면으로 보는 것이지만 오랜 만에 보는 얼굴에 너무 반가웠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갈증도 조금은 풀리는 듯 했다. 다섯 가족이 함께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방언이 터지듯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건배를 하고 치킨도 뜯으며 시간은 두 시간 여를 훌쩍 지나쳤다. 어느 새 코로나가 강제로 만들어준 새로운 트렌드를 나 역시 받아들이고 즐기고 있었다.

   

만남이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온기와 감정을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허나 그것은 방식의 문제일 뿐이다. 랜선으로 연결된 화면을 통해 얼굴을 마주하며 감정을 통하는 것 역시 만남이 아니면 무엇이랴. 보고 싶은 대상이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며 다음을 기약할 약속이 있다면 만남은 언제 어디서든 유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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