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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쾌재 Apr 15. 2022

오늘부터 일일

청설모를 만나다

                              사진=pixabay


머리가 무거울 때마다 찾는 북한산 둘레길.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롯이 홀로 걷는 그 맛에 비할 바는 아니다. 평소 메고 다니는 힙색을 꺼낸다. 물통에 물을 채우고, 간단한 간식거리로 고구마를 쪘다. 이 정도면 산행치고는 그럴듯하다. 아니 오히려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오래고 헤져 익숙한 트레킹화에 새 기운을 불어넣듯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흰구름길 구간으로 들어섰다. 따사한 햇살은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게 하고,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푸른 내음은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듯하다. 나비는 폴폴 눈앞을 지나치는가 싶더니 어느덧 꽃잎 위에 발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또 왔네.’ 하며 싫지 않은 투정을 부리는 듯 까치의 울음소리는 낯익다.

   

트레킹의 여정에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바로 숲과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는 산꽃, 산곤충, 산짐승들과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다. 개나리, 진달래, 꽃창포, 원추리, 옥잠화, 까치, 동고비, 청설모, 다람쥐, 멧돼지, 나비(나비는 정말 종류가 많다), 올챙이, 개미, 딱정벌레 등등 일단 이름을 아는 것만 나열했을 뿐, 북한산 숲의 생물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그렇다. 이 공간에도 생물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저 밖에서 보는 모습이 평온해 그 평온함을 나도 좀 나눠 달라며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을 뿐이다. 존재와 존재의 부딪침이 있으니 얘기치 못한 만남도 있으리라.

   

이 구간에는 야생 멧돼지가 출몰할 수 있으니 산행 시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한번은 체육공원을 끼고 있는 넓은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공원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발길을 재촉하는데, 길이는 내 키만 하고 몸집은 훨씬 커 보이는 멧돼지 한 마리가 떡하니 서 있는 것이다.

   

산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려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을 막아선 멧돼지는 그야말로 공포였다. 순간 근처에 계시던 어르신 한 분이 나뭇가지 하나를 들더니 ‘야 이놈아, 뭐하러 내려왔어! 저리 가! 저리 가!’하며 멧돼지를 나무란다. 멧돼지를 보고도 두려움 없이 소리치는 어르신의 기백이 대단하면서도 저런다고 멧돼지가 알아들을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멧돼지가 어슬렁어슬렁 산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돌아서는 멧돼지의 모습에 등이 오싹해졌고, 왠지 빨라지는 나의 발걸음을 느낄 수 있다.

   

한참을 걷다 보면 소나무 숲이 우거진 길로 들어선다. 길게 쭉쭉 뻗은 소나무 숲은 왠지 운치가 있어 좋다. 그때였다. 뭔가 검은 물체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잽싸게 나무 위를 오른다. 동시에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물체, 솔방울이다. 오랜만에 보는 솔방울이 반가워, 손으로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박혀 있는 잣이 눈에 들어온다. 어릴 때를 추억하며 잣을 빼서는 요리조리 살펴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쳐다본다. 잿빛 털에 긴 꼬리,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녀석이 두 손에 풀잎을 움켜쥐고는 작은 입을 오물거리고 있다. 청설모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청설모를 보다니... 한참을 발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청설모는 ‘나 지금 맛있는 거 먹는 중이야. 먹는 거 처음 봐!’라고 속삭이듯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 얼마 후, 풀잎을 모두 먹어 치운 녀석은 금새 나무 위 먼 곳으로 사라져 간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를 펴고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가방에 넣어둔 고구마를 꺼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숲이 우거진 공간에서 이렇게 자연의 기운과 함께 하는 먹을거리는 건강 그 자체인 듯했다. 그렇게 고구마를 몇 입 베어 먹었을 때 바로 옆으로 무언가 옆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양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다시 고구마로 시선을 옮기려는데 아래로 잿빛 털에 긴 꼬리,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녀석이 보였다. 청설모였다. 그것은 내 주위를 왔다 갔다 하다가는 다리를 들어 쳐다보고는 다시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비록 작기는 하지만 이렇게 바로 옆에서 산짐승을 마주하다니... 덜컥 겁부터 났다. “저리 가!”하며 소리를 치니 놀란 듯 멀어졌다. 그러다 이내 다시 내 주위를 맴돌았다. 다시 “저리 가!”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녀석은 내 주위를 서성였다. 문득 ‘왜 저러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손에 든 고구마로 생각이 미쳤다. 고구마를 반 정도 떼어 청설모에게 던져주었다. 녀석은 두 발로 잽싸게 고구마를 받아들고는 나무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뺏길세라 꼭 쥐고 고구마를 잘잘잘 베어 먹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순식간에 고구마를 먹어 치운 청설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무 위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방금 전 풀잎을 먹던 그 녀석이었을까?’ 잠깐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그사이 친구가 되어버린 듯 궁금해졌다. ‘다음번에 오면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래, 너랑 나랑 오늘부터 일일이다.’ 갈수록 친구 사귀기 힘든 시절에 멋진 친구 하나 생겼다. 숲을 빠져나와 걸으면서 청설모와의 얘기치 못한 시간에 엷은 미소가 번져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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