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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쾌재 Dec 10. 2022

형제의 권투시합

어린 시절, 부모님이 밭일 나가고 나면 항상 동생과 나 둘만 남겨지는 시간이 많았다. 작은 동네에서 친구도 많지 않고 놀잇감도 마땅한 것이 없었던 동생과 나, 엄마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얻어다 주신 전래동화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움 이라면 즐거움 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어디선가 권투 글러브 두 짝을 들고 오셨다.


당시에는 프로 복싱이 한참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다. 4전 5기의 신화로 불리는 홍수환은 이미 전설이었다. 박종팔, 유명우, 장정구 같은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내 두 주먹은 링 위에 오른 챔피언이 따로 없었다. 마징가 Z의 무쇠팔이 어디 부러울 것이 있겠는가. 그중에서도 탄탄한 몸매에 긴 팔로 뻗어내는 박종팔 선수의 펀치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장관이었다.


권투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영웅이 있었다. 바로 ‘록키’다. KBS 명화극장에서 방영된 《록키》의 주인공이었던 바로 그. ‘Gonna Fly Now’의 리듬을 싣고 내달리다 마침내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에서 날아갈 듯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결투(나는 이 장면을 결투라 부르고 싶다)에서 분명 록키가 이길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지만 피범벅이 되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는 그의 모습은 위대했다.


그런 꿈의 현장을 재현해 줄 성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날 이후부터 동생과 나의 전쟁 같은 라운드는 시작되었다.


"아야! 이거 권투 글러브지. 이거 끼고 권투하믄 재밋껏다."

"글지! 안그래도 심심한디 잘됐다. 내가 젤 좋아하는 권투 선수가 록키여! 이 형이 록키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께!"

"마져! 나도 록키가 겁나 머싯드라. 근디 헝 보다는 내가 더 잘할껄. 내가 바로 록키여!"

"그래야? 누가 진짜 록킨지 한번 해보자잉.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업고 한바퀴 돌기다 잉! 글고 맞고 울기 없기여. 자! 시작헌다."

"형아는 인자 내 밥이여. 어여 덤비란께!"


동생과 나는 영화 《록키》의 마지막 장면을 재현이라도 하겠다는 듯 글러브를 끼고 이리저리 어설픈 주먹을 내밀며 게임을 준비했다. 엄마가 귀하게 여기는 솜이불을 방안에 깔고 그 위를 사각의 링으로 삼아 양보 없는 펀치를 주고받았다. 링 위에서 대결은 형제간의 우애라는 건 있을 수 없고, 이건 뭐 쨉인지 훅인지도 모를 주먹을 보지도 않고 마구 휘둘러 댔다.


"아야! 니 내 얼굴 때렸냐. 동생이라고 좀 봐줬드만...으씨! 인자는 안 봐준다."

"형아가 봐주기는 뭘 봐죠! 원래 실력이 그것밖에 안되믄서. 뎀벼. 뎀벼봐!"

"으씨~너! 진짜 까불래. 맞고 울지 마라!"

순간 내가 날린 주먹이 동생의 얼굴을 강타했고, 주먹을 맞은 동생은 결국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 봐라! 형아한테 막 뎀비지 말라니까. 이 형아가 좀 봐줬드만..."

"으씨! 내가 이기고 있었는디... 다시 해! 다시!"

"울지 말랑께. 니 안운다고 했잖아. 엄마 알믄 혼난다. 그냥 니가 이겼다고 해주께 울지  마라!"

"진짜제? 그럼 내가 이긴거제? 글믄 나 업고 한 바퀴 돌아주라. 형아아!"


그렇게 달래서 울음을 그치게는 했지만 문제는 동생의 눈이 퍼렇게 부어오른 것이었다. 분명 이대로 동생의얼굴을 엄마가 본다면 혼이 날게 뻔했다. 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동생의 얼굴을 보시고 호통을 치셨다.


"이게 뭔일이다냐! 원철이 얼굴이 왜 이런다냐? 느그들 뭐했냐?"

"암것도 아니여! 원철이가 걸어가다가 확 넘어져서 눈을 찌어부렀어!"

순간 나는 엄마에게 혼이 날까 무서웠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거짓부렁 허지 말고 똑바로 말 안허냐! 넘어져서 눈을 찌었다고 이렇게 붓는다냐?"

"엄마! 형아 말이 마저! 내가 걷다가 확 넘어져가꼬 이렇게 된거여! 담엔 조심할란께 걱정하지 말어"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씩씩하게 대답을 던진 동생은 나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우리는 다시 형제애로 뭉치고 있었다.


"아따! 조심허지. 이것이 머시다냐!"


다행히 어머니는 동생의 말을 듣고 더 이상은 캐묻지 않으셨고, 나는 동생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엄지손을 치켜 올렸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우리 둘은 부모님이 밭일 나가시면 여지없이 글러브를 끼고 승부를 벌였다. 그럴 때마다 매번 둘 중의 하나는 얼굴에 멍이 들거나 코피가 터지는 냉정한 권투의 세계를 맛보았다. 결국, 두 아들의 말썽이 권투 글러브에서 시작된다는 걸 안 엄마는 어느 날, 조용히 그 물건을 내다 버리셨다. 그렇게 동생과 나의 미완의 승부는 막을 내렸다.


지금도 형제가 만나면 그 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온 몸을 다해 내 안의 흥미와 승부욕을 발동시켰던 권투 시합. 그리하여 눈이 멍들고 코가 깨져도 마냥 즐거웠던 그 시간. 문득 삶의 무게에 발이 무뎌지고 권태로움에 의욕이 자리를 잃을 때 그 치열했던 승부의 순간을 되돌려 본다. 그래서 미완의 승부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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