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쾌재 Mar 31. 2022

꼰대의 장보기

 “여보! 오늘 장 좀 봐야겠는데...” 벌써 먹을거리가 다 떨어졌나 보다. 하기야 사내아이 둘을 키우고 코로나라고 마땅히 나가 외식도 하기 힘든 요즘이다. 집에는 며칠이면 남아나는 게 없다. “내가 퇴근하고 오는 길에 장 봐 올까?” 뻔히 알면서 한 마디 던지는 아내, 거기에 대고 늘 그랬던 것처럼 “아니! 내가 이따가 볼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와.” 하고 확인 메시지를 던진다. 

   

육아휴직을 하고 장보기는 언젠가부터 내 몫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차피 집에 있는 내가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되겠나 싶어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마트를 돌며 장을 보는 게 즐거워졌다. 어쩌면 적지 않은 자기애를 가진 나에게 장보기는 나름 적성에 맞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단 마트에서 제작한 할인 전단지를 꼭 챙긴다. 첫 번째 마트의 전단지를 펼치고 요일별로 싸게 파는 물건을 쫙 스캔해 둔다. 월요일은 시금치와 버섯, 화요일은 딸기와 사과, 수요일은 삼겹살, 목요일은 오징어와 갈치, 금요일은 배, 주말은 생필품이다. 두 번째 마트의 전단지를 펼치고 또 스캔을 시작한다. 역시나 할인 하는 품목이 겹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할인 품목이 겹치면 이번에는 할인율이 문제다. 세 번째 마트의 전단지까지 스캔을 마치고 나면 본격적인 장보기가 시작된다.  

   

장바구니 서너 개를 챙긴다. 마트를 향하며 ‘한 곳에서 한 날에 맞춰 할인을 해주면 얼마나 좋아.’ 하는 내 편의에 맞는 투정을 부려본다. 하지만 말 그대로 투정일 뿐이다. 마트끼리도 할인 품목과 할인율로 눈치작전을 벌이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할인하는 품목, 그 품목에 대한 할인율이 다르다 보니 한군데서 장을 마치는 법은 없다. (사실 내가 사는 곳은 마트 간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 그러니 이러한 장보기가 가능한 것이다.) 

   

물건도 대충 사는 법이 없다. 요리조리 돌려보고 만져보고 상처는 없나, 오래된 물건은 아닌가, 방부제가 많이 들어간 건 아닌가, 그야말로 꼰대처럼 따져가며 장을 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한 팩에 칠천구백 원 하는 딸기를 두 팩에 만 오천 원에 준다는 방송이 들린다. 샀던 딸기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가 딸기를 하나 더 들고는 만 오천 원이라는 가격표를 받는다. 뭔가 뿌듯하다. 혹시 내가 산 물건 중에 딸기처럼 묶어서 싸게 파는 방송이 또 나올까 싶어 괜스레 마트 안을 한 바퀴 더 돌아본다.

   

마트를 세 군데 이상 돌다 보니 요일별로 할인하지 않아도 늘 할인을 적용하는 물건들도 있다. 평소 그런 물건들을 잘 기억해 두면 장보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래야 자칫 저기가 더 싸겠지 하고 갔다가 막상 앞선 마트가 더 싼 경우 다시 돌아가야 하는 악수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몇백 원 차이 몇천 원 차이에 불과한 것도 많지만, 그것이 어딘가. 나처럼 쪼들린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또한 큰 혜택인 것을. 이상하게 몇천 원 더 싸게 산 것보다 몇백 원 더 싸게 사는 데서 오는 희열이 더 크다. 그만큼 좁은 틈을 비집고 올린 성과이니 말이다. 그렇게 장을 보고 가득 찬 바구니를 보면 왠지 뿌듯하다. 육아 대디의 자세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 

   

장보기를 마치면 캐리어 장바구니와 폴딩 장바구니가 가득 찬다. 한 손으로는 끌고 또 한 손에는 걸고 집으로 향한다. 오는 도중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로또 판매점. 양손에 든 물건이 아무리 무거워도 이곳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그래도 일등에 두 번이나 당첨된 나름 명당 판매소다. 

   

복권 숫자를 정하는데도 내 나름의 룰이 있다. 가족과 관련된 의미 있는 숫자들을 조합해 하나를 만들고, 지난주 하나도 맞지 않은 번호는 그대로 간다. 나머지는 자동이다. 언젠가 나에게도 분명 엄청난 행운이 찾아오리라. 행운이 나만 피해서 가라는 법이 있으랴. 중요한 것은 꾸준하게 도전하는 자세이다.

   

알뜰하게 장을 봤으니 아내가 퇴근하면 어깨에 힘 좀 주고 오늘 할인해서 산 물건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리라. 나는 그냥 집에서 노는 사람이 아니라는 어필이기도 하다. 

   

거창한 행운을 꿈꾸는 것도 나의 행복이요,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려고 마트를 옮겨 다니는 것도 나의 행복이다. 꿈꾸는 것이 이루어지면 더 행복할 것이고, 뭐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을 대신할 소소한 행복은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오늘도 꼰대의 장보기는 계속된다.

작가의 이전글 구멍난 고무장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