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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뜻 Jul 14. 2022

수면 위에서-1

"요즘에 안 그런 사람이 있나요 ?"


얼마 전에 면접에서 들었던 말이다. 면접관은 나의 경력도, 나의 출신도, 나의 어학점수도, 나의 의견도 모두 일반적이고 지리멸렬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딘가 골이 났나 싶었던 그는 탁한 얼굴을 하고는 나를 마주보았다. 화를 내고 싶어서, 짜증내고 싶어서 부른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 즈음, 면접은 끝이 났고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다신 보지 말자, 를 뇌까렸다.


법적으로만 겨우 성인인 나이가 되어 찾아온 서울은 항상 차갑고 기묘했다. 낯선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불합리성과 비논리성을 이해하려는 무해한 노력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은 항상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갓 태어난 도도새가 된 기분이었다. 여기는 어디. 나는 이미 도태되어야 했을 무엇이지 않을까. 내가 손을 뻗으면, 내 손에 무엇이 잡힐까. 그 것은 내 것인가?


10년동안, 서울을 에둘러 싸고 그 안에서 걷고 호흡을 뱉으며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내가 나를 키운다는 것은 몸을 누이고 숨을 쉬는 데에도 돈이 든다는 뜻이다. 나는 나를 굶어죽이고, 슬퍼서 죽어버리지 않게 하려 이리저리 팔과 다리를 늘려보았다. 덕분에 이력서에는 경력이 몇 줄 쌓였고, 이제는 집에 달마다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경이롭게도, 보드랍고 따뜻한 생명을 곁에 두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서울이 재미없다. 



몇 번의 서류 심사와 면접에서 거절당한 뒤, 나는 황망한 마음이었다. 사실 거의 항상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쟁취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이 이런 일에 면역이 없었다. 특별히 눈에 띄게 잘난 것도 아니고, 열정이 넘쳐 남들을 감명받게 하지도 못했지만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인력이었고, 학생이었으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모호한 나이와 함께 덩그라니 남겨져,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고개를 갸웃거려 보지만, 마치 사춘기때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마을을 읽어내려는 시도와 같이, 손에 잡히는 것 없이 더욱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포르투갈엔 두 번 갔다. 스물 한 살 겨울, 새해를 유럽에서 맞았던 그 때에 포르투갈은 유난히 따뜻했다. 현지에서 만난 다정한 얼굴이 말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이 언제나 맑고 따뜻한 것은 아니나(본래 겨울에는 안개도 많고 비도 많이 온다고 했다) 드레스덴의 추위에 파랗게 질려버린 나에게, 포르투갈과 포르투는 너무나 따뜻한 곳이었다. 계획을 따라 차근차근, 마치 숙제를 하듯 여행을 하던 나는 포르투에서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다음 일정을 취소하면서 3-4일을 더 머물렀던 것 같다. 그렇다고 무엇을 했냐 하면, 놀랍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쉼 없이 걷고, 건물을 올려다보고, 타일을 매만지고, 강가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낯선 얼굴을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봤을 뿐이다.



이렇게 힘든 시간에는, 포르투갈을 생각한다.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무엇인가에 부딪힐때면, 당연하다는 듯이 포르투의 바람이 생각났다. 추운 겨울날 코트 주머니 안의 핫팩을 손끝으로 더듬어 꼭 쥐어보듯이. 포르투갈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했다. 



도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지쳐있다. 본래 세상에 다친다는 것은 이런게 아닐까? 묘하게 때 탄 문손잡이처럼, 반질반질 닳고 윤이 나는것 같으면서도 가까이서 보면 조금 삐걱거리고 생채기가 가득한… 



나의 현실적인 뇌는 나의 경제상황과 생활상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가 무엇인지 떠올린다. 돈은 전세금을 빼다 쓰면 될 것이다. 은행에게 빌린 돈을 떼면 얼마 안 남을 것이란 걸 알지만, 그만한 돈이라면 어딘가에 몸을 뉘일 수 있다.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도 있다. 그를 위해 밥과 모래, 작은 안식처도 준비해주어야 한다. 그를 위험으로부터 차단하려면, 당연히 공동생활은 선택지에 넣을 수 없다. 결국 가장 메마르고 기본적인 뼈대만 추려 바다를 건넌 후 포르투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매일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포르투의 돌로 만든 울퉁불퉁한 길바닥의 감각을 떠올리며, 조금 다시 힘을 낸다. 그러니까, 살아서 그곳까지는 가고 싶으니까, 어떻게든, 조금만, 더, 하면서.


모든 것을 일시정지 하는 것이다. 농담처럼 하던 ‘시간과 정신의 방’을 만들어보는 것이나 다름 없다. 내가 멈춰서 바람을 맞는 동안, 세상을 끊임없이 약진해 나갈테니까. 그런것들이 나를 못살게 했다. 나를 두고 다들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듯 하여, 길을 모르는 나는 항상 어린애처럼 초조하고 울먹인다. 그이들도 사실 주저하거나 무모하게 발을 내딛고 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게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데, 우리는 걸어 나가는 걸까? 무언가를 알고 움직일 여유를 가질 수는 없는 걸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발전과 진행에 반대한다면 어떨까. 인류 초유의, 가장 인간적이고 시적인 파업이 될 것이다. 우리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을 생각하며 상대를 바라볼 수 있을텐데. 무엇을 원하는지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말을 가다듬고, 근력을 붙여 더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시간은 항상 얄팍하고 우리는 너무나 바쁘다. 


그러니까, 나는 선로를 이탈하여 혼자서 시간의 흐름에 거부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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