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앞둔 마지막 전화에서 아빠는 내게 신신당부했다. 우리 딸, 욕심 내서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정리해. 3개월, 아니 6개월에 걸쳐 정리한다고 생각해. 이삿짐 정리에 6개월이라니 터무니없이 길게 잡은 기간을 곱씹을 때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할 일을 눈앞에 두고 결코 가만있지 못할 성미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매번 이삿짐을 싸고 풀 때마다 나는 다시금 놀라고 만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툭 치면 날아갈 듯 비리비리한 몸뚱이와 놋쇠 그릇 하나조차 들어 올리기 벅찬 가는 손목으로 수십 개의 박스를 이리 밀고 저리 밀며 정리하는 내 모습을 보며 사람은 누구라도 때때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말이 사실임을 실감한다.
일주일이 걸렸다. 집안 곳곳에 쌓아 놓은 이삿짐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풀어 제자리를 잡아 주는 데 고작 일주일이 걸렸다는 사실에 두어 번쯤 팔뚝에 소름도 돋았다. 나는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끄럽고 낯선 모습은 스을쩍 사라지고 여기저기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아 단정하고 익숙해진 집안 풍경을 눈에 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다람쥐처럼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손이 닿지 않는 장롱 위칸과 부엌 상부장을 하얀 걸레가 검어질 때까지 박박 문지르고, 박스를 칭칭 동여맨 빨간 테이프를 가위날로 그어 속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 올리고, 그새 잘잘한 모래와 먼지가 묻은 표면을 하나하나 닦아가며 위치를 잡아주었다. 이 칸에도 넣어보고 저 칸에도 넣어보고 그러다 더 좋은 생각이 나면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도 가며 물건에게 저마다 어울리는 집을 찾아주면 어색하기만 했던 공간에 슬며시 정이 가고 비로소 내 집이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짐 들어오기 전에 완성해 주기로 약속한 모기장이며 커튼이며 어느 하나 제대로 마무리된 것이 없어 앞으로 몇 주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겠지만 어수선한 공기 속에서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편안함이 더없이 고맙고 의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