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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 망고 May 13. 2024

쓰기 싫은데 쓰고는 싶은 보고서

01. 사서 고생

나는 인도에 진출한 모 대기업의 현지 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작은 작년 봄이었다. MZ세대가 이끄는 인도의 소비시장 트렌드를 생생하게 포착하라며 각 국에 한 명씩 뽑는 청년 맞춤형 대외활동이었다. 지원 자격 요건을 읽어보니 어느 모로 보나 승산이 있어 옳다고나 이제 내 목표는 바로 너다, 후딱 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깐깐한 심사를 받았다. 지원서만 제출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샘플 보고서도 제출해야 했고 심지어 여러 단계를 거쳐 인도 통신원으로 합격한 후에도 만약 첫 번째 정기 보고서에서 기업이 원하는 퀄리티가 나오지 못하면 1회 활동만으로 관계가 종결된다는 무시무시한 공지까지 상냥하게 전달받았다. 이렇게 타이트한 대외활동은 오랜만이라 식은땀이 흐를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죽일 놈의 도전정신 때문에 사서 고생이다.


나와 기업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가 있다. 각국의 통신원은 기업과 직접 연락하는 대신 제3의 에이전시와 소통한다. 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하고, 보고서를 제출하고, 애로사항을 토로하고, 수정사항을 전달받고, 활동비를 지급받는 것까지 일련의 모든 과정이 에이전시와 메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뤄진다.


첫 번째 보고서를 완성했을 때 혹시 이제 단칼에 잘리는 건 아닌가 상상하기도 했다. 그랬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싶기도 하다. 당장엔 조금 창피해도 지금쯤 마음은 편했을 텐데 그러질 못해 아직까지도 잊을 만하면 한 편씩 보고서를 쓰고 있다. 나는 잘리지 않았고 남은 두 번을 더 채워 2023년 활동을 마무리했다. 그것도 모자라 2024년에도 통신원을 뽑을 생각인지, 그렇다면 나도 다시 지원하고 싶다며 찜까지 발라 놓은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열심히 활동해 준 당신에게 또 맡기고 싶다는 따뜻한 칭찬과 함께 2024년까지 활동 기간이 연장됐다.


매 회 10장가량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수정하고 완성할 때마다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이번엔 또 무슨 주제를 제안해야 한 번에 통과되려나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얼마큼의 적절한 자료를 긁어모아 분석해야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머리가 아프다. 수십 편의 기사와 소셜미디어를 이 잡듯 뒤질 때면 정작 나는 하지 않는 SNS를 이렇게까지 봐야 하나 덜컥 현기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더군다나 내가 작성한 보고서가 정확히 어떤 편집을 거쳐 어떤 임직원에게 공유되는지조차 기밀이라 지금껏 내가 쓴 글의 최종편집본을 본 적이 없다. 기이한 시스템이지만 나는 그저 내 몫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해 왔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숨 푹 쉬면서 화면 앞에 앉아 눈에 힘주고 한 장 두 장 보고서를 채워가면 그 끝에는 사랑스러운 완성물이 있다. 지지고 볶은 몇 주의 고민이 입안에 솜사탕 녹듯 사르르 사르르 온데간데없고 이번에도 해냈다는 뿌듯함에 어깨가 한껏 치솟는다. 한 고비 또 꺾었으니 이제 몇 번만 더 쓰면 올해 활동도 끝이라며 다독이고 다시금 새로운 주제를 찾아 나선다.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일 년도 후딱이다,


쓰기 싫은 글을 쓰는 것도 꼭 필요한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임했다. 담임 선생님이 내주는 방학 숙제부터 졸업시험 대체 논문까지 많은 글을 쓰면서 배운 교훈이 있다면 아무리 쓰기 싫은 글이더라도 결국은 쓰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글이 생각보다 괜찮은 결과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 통신원으로서 분기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나는 매번 신음을 내지른다. 으아아아 오늘은 진짜 쓰기 싫다! 먹고 죽을래도 집중이 안 되는데 이 일을 어찌할꼬? 앓는 소리 삐죽삐죽 터뜨려도 결국은 마감 전에 어떡해서든 제출하고 말리라. 나는 그럴 사람이란 것을 스스로 믿기에, 그렇게 약속을 지킨 스스로를 무척 자랑스러워할 것을 알기에 오늘도 인도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참말이지 쓰기 싫은데 쓰고는 싶은 보고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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