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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 망고 May 26. 2024

그들이 듣고 싶은 체험기

02. 독자 마음

인도에 온 지 반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꽤 재밌어 보이는 해외 생활 체험 수기 공모전을 발견했다. 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던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광고를 쌩 하니 지나칠 수가 없었다.


공모전은 공모전이었다. 싶은 소리만 늘어 벌린다고 당선될 리가 없다.  보여주고 싶은 인도와 독자가 싶은 인도 서로 닿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썼다 해도 퀴퀴한 서류 더미 속에 묻히고 말 텐데. 조바심에 주제 선정에만 며칠이 걸렸다.


고르고 고른 주제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6개월 동안 인도에 살면서 느낀 허심탄회한 심정을 '괜찮다' 혹은 '좋다'는 뜻의 짧은 힌디어 문장 "ठीक है"로 도출해 냈고, 비록 제한된 분량은 짧지만 그 안에 오만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던 지난 시간을 덤덤하게 담았다. 애를 쓴 만큼 글에 대한 애정도 커져만 갔고 실수 없는 완벽한 글을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에 결국 원고를 제출하는 날에는 전문을 외워버린 상태로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당선은 되지 않았다. 입으로는 나 진짜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솔직히 김칫국을 조금 마시긴 했다. 인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만한 주제였다고 생각했다. 또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소소한 감동도 자부했다. 글을 쓰고 제출하고, 또 글이 뽑혀 어딘가에 실리거나 짭짤한 푼돈을 버는 일에는 나름 이골이 나서 이번에도 스리슬쩍 당선이 되겠거니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왜 내 글이 뽑히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오탈자, 문장 호응, 글의 짜임, 문장력, 리듬감, 모든 부문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나의 꼬장꼬장한 성격을 고려하면 이런 기술적인 부분이 문제가 되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주제다. 이건 분명 주제가 미약했던 것이다.


나는 화면 앞에 앉아 다시금 한글 파일을 열었다. 인도에 살아보지 않은 평범한 제삼자의 눈알을 잠시 빌려다가 내 눈알 대신 끼워 넣자는 괴상한 주문을 외우며 글을 읽어나갔다. 보이지 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원고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겠다. 인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였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나 캄보디아 프놈펜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소위 저개발국의 일상일지도. 결국 한 문장으로 쭉쭉 비틀어 짜내면 '인도 생활이 이러저러한 까닭에 쉽지 않지만 나는 잘 적응하고 있다'가 줄거리다. 쓴 사람 눈에나 감동적이지 독자의 마음에 그리 큰 울림을 주지 못했겠다는 결론에 이르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남은 선택은 한 가지, 재도전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될 일이 아닌가. 다음 해 같은 공모전에 다시 체험 수기를 제출했다. 이번엔 인도가 아니면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끝내주는 풍경을 한껏 그려낸 여행 수기를 작성했다.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한 모금씩 찔끔찔끔 녹아있는 원고가 나왔다. 나는 조금 더 겸손한 마음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꼭 당선이 아니라도 누군가 내 수기를 읽고 인도가 이렇게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곳임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하는 마음이었다.


당선되었다. 칠전팔기라는 말에 비하면 일전이기는 너무나 빠른 결과라 그저 감사했다. 아주 소정의 원고료도 받았다. 하지만 당선 사실이나 원고료보다 곱절은 중요한 선물을 받았다. 글을 쓸 때는 독자의 마음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함을,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독자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 아주 골똘히 생각해야 함을 가르쳐주었으니 이보다 귀한 선물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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