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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May 07. 2023

플랫 메이트,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편함

앞서 내 첫 플랫 메이트이야기를 하다보니 그간 겪은 플랫 메이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영국에서만 3번 이사를 했는데, 약 1년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본의 아니게 꽤 자주 이사를 하게 됐다. 내 인성에 문제 있나, 생각할까 봐 선수 쳐서 변명하자면 첫 번째 이사는 배정받은 기숙사에서 갑자기 공사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더 먼 기숙사로 들어간 거였다. 두 번째 이사는 학기가 끝난 후 옥스퍼드에서 런던으로 가면서, 그리고 마지막은 운 좋게 구한 일자리 근처에 또 운 좋게 가성비 좋은 집을 구하게 되어 이사한 거니 오해는 마시길, 이라고 쓰지만 사실 이러한 이사의 가장 큰 이유엔 함께 사는 플랫 메이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다. 


이렇게 적지 않은 이사로 남은 건 근 스무 명 정도 되는 플랫 메이트와의 추억(?)이다. 영국인 친구는 물론이고 브라질 친구에 우크라이나 친구까지, 오대양 육대주에서 온 친구들 중에는 못된 X, 더러운 X, 주는 것 없이 미운 X, 짜증 나는데 미워할 수 없는 친구, 천사, 핵인싸, 예쁜 애, 그 옆에 또 예쁜 애 등등… 역시나 온갖 군상이 한 데 모여 있었다. 


대학 다닐 때도 기숙사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일하기 시작하면서는 가족이랑 사는 것도 답답해서 자취를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 차. 내 인생에 이렇게 다채로운(이라 쓰고 ‘원치 않는’이라 읽는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줄은 나도 몰랐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누가 말했나.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를 영혼까지 끌어올려 말한 적도 있고, ‘이걸 말해, 말아’와 같은 갈등과 번뇌의 시간을 수백 번 가졌을 정도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일,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몸소 배우는 중이다.


 참을 수 없었던 이러한 존재들을 간략히 훑어보자면, 걔 중에 으뜸은 중국에서 온 플랫 메이트였다. 그녀는 장장 7개월 동안 하루에 네 시간씩 남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가 헤어지길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그 시간에 영어를 했으면 원어민이 되고도 남았겠다고 욕을, 욕을 그리 해댔다). 이렇게 남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애들의 공통점은 정말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다. 몰상식한 전화통화는 물론이거니와 쓰레기 분리수거는커녕 자기가 씻고 나온 샤워실조차 제대로 치우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분리수거에 철두철미한 나라인지, 사람들 대부분 지킬 건 다 지키는 시민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은 덤이다. 어쨌든 이따위로 행동하는 그녀와 나와의 관계는 상극 중의 상극이었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는 친구와 싸워본 기억이 없는데, 여기서, 그것도 영어로 싸워보는 진기한 경험을 선사해 준 플랫 메이트다. 결국 함께 살던 영국, 일본, 브라질 플랫 메이트 모두가 참다못해 그녀를 기숙사에서 내쫓아 달라는 탄원서까지 쓰게 만든, 어메이징한 플랫 메이트 중 하나다. 


또 다른 한 명은 울림통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 좋은 친구였다. 이 말인즉슨, 그가 방에서 말을 하거나 전화를 할 때면 나는 그 소리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또 노래는 왜 그렇게 크게 틀어 대고, 여자 친구는 왜 그렇게 자주 데려오는지, 거기다 여자친구 목청도 왜 그렇게 좋은 거야… 그런데 참 미워할 수 없었던 게 이런 불편 사항을 이야기하면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그 뒤로는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뒤끝도 없어서 언제나 살갑게 먼저 인사해주는 그런 해맑은 심성을 가진, 짜증 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친구 1이었다.


한 명은 자기는 그렇게 예민할 수 없다며 우리에게 청소면 청소, 소음이면 소음 모두 조심해 달라고 하던 친구였는데, 이게 웬걸, 이 예민함은 오로지 타인을 향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기 친구들을 초대해 새벽 여섯 시까지 시끌벅적하게 놀지를 않나, 그 집에서 음악을 가장 크게 트는 사람은 바로 그렇게 예민하다던 본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플랫 메이트들이 부엌에서 마주쳐 얘기라도 할라치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 노래를 엄청 크게 틀어 놓는,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개복치스런 예민보스를 한껏 뽐내던 이도 있었다. 그래서 여기와서 가장 많이 한 말에는 ‘I don’t get it’ ‘I don’t understand’가 일, 이등을 다툰다. 큰 차이는 없다. 둘 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이해할 수 없어!!!”를 외치는 것은 똑같으니. 내 상식선에서는 절대 이해되지 않는, 이런 다채로운 플랫 메이트를 만나면서, 그리고 이들을 욕하면서 수도 없이 한 말이다. 


나는 이 참을 수 없는 불편한 존재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플랫 메이트를 만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이들 역시 난리부르스를 치는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상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인간답게 행동하는 정의와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인할 뿐, 그 누구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역시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 까탈스럽고 예민한 플랫 메이트 1이라는 것. 오히려 그 누군가에게 내가 극도로 불편한 존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해 못 하는 ‘너’도 안 바뀌지만 문제는 ‘나’도 안 바뀐다는 것. 결국 사람 사는 건 정말 어딜 가나 다 똑같다는 것. 


가끔 영국에 가서 뭘 배웠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위의 구구절절한 내용은 다 스킵하고 결국 내 대답은 정말 저렇다. 결국 사람 사는 건 어디 가나 다 똑같다는 이야기. 어떤 답변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들의 표정을 보면 나는 그들이 기대했던 바에 전혀 부합하지 못한 것을 배우고 온 것만은 확실하다. 빡세게 학교도 다니고 새로운 문화도 경험했지만, 적어도 내가 뼈져리게 배운 배움의 끝은 저 명제로 귀결된다. 


다시 생각해도 뒷목이 뻣뻣해지는 이런 플랫 메이트들만 있었다면 분명 나는 못 견디고 한국에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도 문득문득 연고도 모르는 이들과 살면서 동선이랄 것도 없는 이 작은 방에 누워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현타 세게 올 때가 있으니까. 이럴 때 그래도 나를 다시 붙잡아주는 건 또다른 플랫 메이트의 존재였다. 아침마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물 마시러 부엌에 내려가면 파자마 차림의 다른 플랫 메이트들을 마주친다. 서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코로나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아침 메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별거 아닌 이러한 소소한 이야기들로 서로의 아침을 열어주곤 한다. 또 위와 같은 공공의 적, 참을 수 없는 불편한 존재의 플랫 메이트 욕을 하며 더욱 돈독한(?) 우정을 다져가면서 말이다. 대단한 일도 없고 엄청 친한 것도 아니지만, 그저 하루 일상을 편히 공유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건 꽤 큰 안정감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가 애정하는 나의 첫 플랫메이트 ㅎㅎㅎㅎㅎ

다행히 마지막 이사한 플랫은 누구 하나 모난 사람 없이 깔끔하고 조용해서 대만족 중이긴 한데, 잠깐, 한 무리에서 또라이가 없다고 느끼면 그 또라이는 나라고 하던데……나 역시 또다른 누군가의 참을 수 없는 불편한 존재로서 각인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한다. 결국 여기서도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유효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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