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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Jul 01. 2022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2022)

침몰하는 배 위에 탈출해 또렷한 세상 앞으로 

야코의 아름다운 춤사위 

카메라는 야코의 움직임을 춤을 추듯 유연하게 따라간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왈츠. 침대에서 일어나는 뒷모습부터 휠체어에 앉는 장면까지 컷을 끊지 않고 연결한다. 다발경화증으로 인해 다리가 마비되고, 시각을 잃은 야코. 그는 감각에 의존하며 매 순간 어둠을 마주한다. 티무 니키 감독은 의도적으로 야코가 보는 시야를 프레임 안에서 차단한다. 그와 동시에 관객의 시야도 제한된다. 또한 포커스 아웃된 야코의 휴대폰 화면과 함께 그가 보는 모든 정보 값을 알 수 없게 만든다.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 또한 프레임 안에서 얼굴을 자르며, 틸트 시프트 렌즈를 사용해 왜곡된 초점을 만들어내며 불안정한 느낌을 부각한다. 이미지의 복합적인 구성은 집 안에 홀로 남겨진 듯 고립감을 형성한다. 관객들은 야코와 마찬가지로 ‘목소리’에 의존하며 이미지를 상상하며, 천천히 야코의 삶에 발을 들이민다. 이러한 방식은 앞서 말한 <잠수종과 나비>에서의 시점 샷과 맥락을 함께한다.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온몸이 마비되었지만 움직일 수 있는 왼쪽 눈꺼풀로 보는 장 도미니크의 세상은 야코가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과 닮아있다.


연인인 시르파의 전화로 시작되는 야코의 삶은 다양한 음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음성의 형태는 희미하지만, 야코는 손의 감각들로 그것들을 익힌다. 화상전화를 통해 시르파는 야코의 집에 있는 영화 블루레이 진열장 안의 <타이타닉>(1997)을 보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야코는 <타이타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잘 계산되고 비싼 똥 덩어리를 만들었어.” 그는 슬래셔 장르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존 카펜터 감독의 <할로윈>(1978)가 최고의 영화라고 찬양한다. 시르파는 야코의 반복되는 꿈 이야기를 듣고 타이타닉을 보라고 언급한다. 그녀 역시 혈관종을 앓으며, 같은 아픔을 함께 공유한다. 거울의 반사되는 면처럼 닮은 두 사람은 온라인상에서 서로를 만나고, 일상에 스며들어 가득 채운다. 하지만 심리적 거리와는 다르게 물리적인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언젠가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 앞에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그들은 <여인의 향기>(1993)의 알 파치노가 추는 탱고만큼 애절하다. 야코가 시르파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관객들 역시 프레임 안에 담긴 주인공만을 볼 수 있다. 춤을 추는 대상의 부재로 인해 야코의 춤은 무언가 텅 빈 듯 공허하다. 서로가 머물고 있는 삶은 물이 차올라 침몰해가는 배와 닮았다. 허공에 손을 뻗는 두 사람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사랑하는 그녀, 시르파가 있는 헤맬랜드로 가기로 결심하는 야코. 보조인 없이 집 밖으로 나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 야코는 꽤나 이상적이다. 소리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도 즉흥적으로 2시 열차를 예매한다. 집 안에 속해있는 야코의 삶은 생각보다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언제 파도가 몰려올지 모르는 바다와 같기에 집 밖으로 나가는 그의 불안정한 발걸음은 공포영화를 방불케 한다. 마치 존 카펜터 감독의 <할로윈>에 나오는 마이클 마이어스를 대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야코는 헤맬랜드 행 2시 기차를 타기 위해 집 밖을 나선다. “나는 자유다”를 외치는 야코. 2시행 헤맬랜드 행 기차가 출발하고, 관객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Stranger man이 야코의 앞에 다가온다. 




미지와의 조우 

기차의 객실에 앉아 야코를 바라보는 Stranger man. 그 남자가 악역인지 아닌지조차 정보를 알 수 없다. 프레임 안의 희미한 세상은 관객들로 하여금 정확한 판단을 놓치게 한다. 남자로부터 납치를 당한 후 새로운 공간에 들어갈 때, 영화는 1분가량 블랙화면을 지속한다. 이는 앞서 말한 체험형 영화 형태를 띤다. 어둠을 같이 마주하며, 미지에 대한 공포를 관객들에게 동일하게 제공하는 것. 납치된 상황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야코는 세상 앞에 몸을 찢겼지만 다시금 소리친다. “나는 자유다.” 울부짖는 그의 음성은 점차 생존을 위한 간절함으로 변해간다. 포효하는 동물과도 같은 야코의 외침은 앞서 집 밖을 나올 때 외쳤던 자유와는 다르다. 그는 세상이 다시금 내민 손을 부여잡고 안전하게 시르파의 집 앞까지 도착하게 된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예측 불가능한 상황 앞에 무너져 내린 야코. 엔딩부에 가까워져 야코가 시르파의 얼굴을 만지는 장면은 이전까지 인물의 얼굴 제한적으로 보여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포커스를 맞추며 또렷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의 몽타주는 단독 컷으로 시르파를 보여준 이후에 투 샷으로 야코와 시르파를 보여준다. 또한 야코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보여주던 장면들은 행동을 보여주는 와이드 한 샷으로 변한다. 야코의 세상에 진입한 시르파는 그의 손끝에 닿던 점자에서 형태가 뚜렷해진 형태로 완벽한 착륙을 성공했다. 야코는 시르파에게 <타이타닉> 블루레이를 건네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왜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이런 질문들은 침몰하는 배 위에 올라타 영화의 핵심부를 찌른다. 1997년 개봉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은 로즈(케이트 윈슬렛)과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생과 사 앞에서 세기적인 사랑을 다루는 영화다. “자기는 그 영화에서 누가 되고 싶어?” 야코와 시르파는 또 다른 이름의 잭과 로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들 역시 침몰하는 자신의 삶 앞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야코가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꿈속에서 반복되는 달리는 모습처럼 자신의 삶에서 도망치며 마주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코는 시르파가 있는 헤멜랜드에 도착하며, 침몰해가는 배에서 자신의 삶을 구조했다. 누군가를 통한 구원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야코 스스로 탈출을 감행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마치 잭과 로즈가 암흑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가라앉는 배 위에서 나온 것처럼 야코 역시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 침몰해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벗어나 시르파의 앞에 섰다. 이제 야코는 <타이타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손을 잡아줄 누군가를 만났기에. 




*이 글은 아트나인 아트나이너로 작성된 글입니다. 아래에서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iframe_url_utf8=%2FArticleRead.nhn%253Fclubid%3D25494727%2526articleid%3D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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