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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Jul 01. 2022

<태어나길 잘했어>(2022) 최진영

'쩔어있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결핍은 흔히 덧셈과 뺄셈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언가를 더하는 방식으로 옳은 것처럼 여겨진다. 결핍을 가진 캐릭터에게 매번 새로운 것을 부여하고 그로 인해 비어있는 공간을 채운다. 물론 결핍을 채운다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저 결핍을 인정하면 안 되는 것인가? <태어나길 잘했어>는 결핍을 하나의 특수성으로 보고 인정하기를 시도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에 대한 결핍을 다룰까?



존재 부정과 단절된 소통


“저는 좀 쩔어있어요.” 


마늘 까는 것을 생업으로 하며 살아가는 춘희(강진아)는 땀에 쩔어 살아간다. 그 돈으로 다한증 수술을 하려는 춘희. 그녀의 다한증은 사람들과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다. 영화는 1998년과 현재를 오가며 어린 춘희(박혜진)와 춘희(강진아)가 조우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치 이경미 감독의 <미스 홍당무>처럼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 홍조증을 지닌 양미숙(공효진)과 춘희는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영화의 오프닝 어린 춘희는 난롯가에 손을 대며 땀을 말리려는 시도를 한다. 이내 영화는 현재의 춘희로 넘어와 화상 자국에 그을린 손을 보여준다. 춘희의 흉터는 침묵하고 참는 법이 새겨놓은 낙인과도 같다. 










춘희가 처음 자신의 손에 난 땀을 숨기는 장면은 자신의 부모님 장례식 이후 살게 된 외삼촌의 집을 보여주는 신이다. 영화의 오프닝이기도 하면서 춘희가 인생의 변곡점 앞에서 어떤 식으로 달라지는지도 알려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어린 춘희를 중간에 두고 싸우는 외삼촌네 가족들은 춘희가 손을 감추는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이때 춘희가 가지게 되는 결핍은 가족이다. 부모님을 전부 사고로 잃고, 외삼촌 가족들은 자신을 반겨주지 않는다. 춘희가 선택한 것은 바로 자신의 말을 삼키는 것. 결핍은 다한증이라는 새로운 특수성으로 치환되었다. 다락방에서 살게 된 춘희는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에서만 숨을 제대로 쉰다. 이외의 공간들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가족 중 한 사람, 할머니(변중희)는 춘희의 편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녀 역시 춘희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 택한다. 다한증 때문에 고초를 겪는 춘희의 발 때문에 얼룩진 거실 바닥을 닦아냄으로써 손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지운다. 다한증으로 인해 춘희가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받기에 다한증이 주목을 받는 것이다. 영화의 주요한 플롯의 전개는 현재의 춘희가 번개를 맞으면서 시작된다. 번개를 맞은 이후 현재의 춘희는 1998년의 어린 춘희를 만나게 되는데, 어린 춘희는 세상과 가족에게 치이는 것의 연속이다. 프레임 안을 가득 채운 어린 춘희의 시간들은 오롯이 혼자다. 




다락방을 탈출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과 조우하는 성장 영화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데 한없이 부족한 수식일지도 모른다. 생과 사의 흐름을 관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번개를 맞은 춘희가 죽지 않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의미를 지닌다. ‘문’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입이 되어준다. 문을 통해서 넘어가 도달하는 세계를 통해 춘희는 어린 춘희에게 말해준다. 과거의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의 일부를 부정당하며 살아온 춘희에게 과거와 현재의 삶은 모두 암흑이다. 그저 자신이 지켜낸 오래된 집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네모의 꿈을 부르며 노래방을 방방 뛰어다니는 어린 춘희. 숨죽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다락방과는 달리 노래방은 목청껏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공간이다. 교실에서조차 어울리지 못하며 자신의 시선이 닿는 내부의 세계 안으로 더욱더 파고 들어간다. 외부의 세계로 확장되지 못한 채, 춘희는 달팽이처럼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자 자신만의 동굴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현재에도 보존된 것은 순수하고도 때 묻지 않은 표정이다. 


춘희의 앞에 말을 더듬는 남자 주황(홍상표)가 나타난다. 상담 클래스에서 만난 그 역시 결핍이 특수성으로 치환된 케이스다. 아버지에게 지속적인 학대를 당한 이후 말을 더듬게 된 주황은 춘희의 땀이 나는 손을 맞잡는다. 하지만 춘희는 스스로를 지켜온 캐릭터로 주황의 보호를 거절한다. 나의 결핍이 다른 이를 통해서 보완되지 않는 것처럼. 평행세계로 이어져온 어린 춘희와 현재 춘희의 시간은 집 안에 갇혀 맴돈다. 어린 춘희가 여름방학 숙제로 만든 수수깡 집처럼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할 수 있는 것들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부서진다. 다락방 하나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세월은 외삼촌네 가족이 집을 나가라고 하는 순간 무너진다. 평생 집을 지켰지만 결국 쫓겨나는 춘희. 다락방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락하지만 다 큰 태아가 자라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공간이다. <그래비티>(2013)의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이 우주선 안에서 몸을 웅크리며 대지에서의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비좁은 공간 안에 자리 잡은 생명력 강한 아이는 너무 오랜 시간 갇혀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외부의 강력한 힘이 춘희를 끌어당기지 않는 이상은. 



어린 춘희에게조차 비좁았던 공간은 현재의 춘희에게는 프레임을 꽉 채울 만큼 여유가 없다. 어쩌면 평행세계에서 현재의 춘희가 어린 춘희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 멈춰서 내면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을 영화는 두 사람의 조우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사촌 오빠는 춘희가 부동산을 피해 마음대로 열쇠를 바꾼 것에 타박하지만, 카메라가 비추는 춘희의 측면 얼굴은 각성된 상태다. 사촌 오빠를 보고 자신의 집을 지킨 것에 대해서 울부짖는 춘희의 모습은 한 마리의 야수와 같다. 똑바로 그를 응시하며 세상을 향해 외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춘희의 화상 입은 손이 기억나는가? 춘희에게 불은 그을림의 산물이자 고통 앞에 타들어간 외침이었다. 춘희는 어린 춘희가 불에 손을 대는 것을 낚아채며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꼭 안아준다. 기존의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향하는 춘희는 자신을 보호하던 다락방에서 벗어나 두 발로 서기를 시작한다. 아이가 처음 걷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춘희 역시 캐리어를 끌고 집 밖을 나가며 말한다. “춘희야 태어나길 잘했어” 춘희가 어린 춘희를 꼭 안아줬듯이 이 세상 모든 춘희들에게 “태어나길 잘했어”라고 말하고 싶다. 



* 이 글은 아트나인 아트나이너로 작성된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iframe_url_utf8=%2FArticleRead.nhn%253Fclubid%3D25494727%2526articleid%3D9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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