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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Jul 01. 2022

<여름 이야기>(1996) 에릭 로메르

거짓말과 눈속임으로 인해 보류된 마음들 


찌는 듯한 태양처럼 열기가 가득한 캐릭터들의 마음이 담긴 에릭 로메르의 사계절 시리즈 중 두 번째 <여름 이야기>는 정열적인 영화다. 소설의 챕터처럼 날짜별로 나눠진 구성과 2주에 걸친 사건들, 연속적인 우연과 일상들은 에릭 로메르 특유의 대화와 말의 공백을 통해 이뤄진다. ‘진심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캐릭터들은 선택을 한다. 거짓말이라는 레이어를 한 겹 쌓아올린 이야기는 진심이 부재하다. 여름을 맞아 휴가를 온 가스파르는 여자친구인 레나로 인해서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자신과 함께 보내기로 한 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레나의 행보 때문에 언제 돌아올까 전전긍긍이다. 뮤지션을 꿈꾸는 가스파르는 선원의 노래를 만들고 싶어 하고, 2주간의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부재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은 가스파르를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주위를 맴돌면서 상사병에 걸린 로미오처럼 레나를 그리워하는 가스파르의 모습은 점차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 


여행지에서 만난 마고는 가스파르의 이런 마음속에 침투하려 한다. 하지만 ‘미완성’ 상태인 남자는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부딪히고 부서지는 파도처럼 가스파르는 그저 흘러갈 뿐이다. 마고와의 만남에서 가스파르의 이중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마고와 가스파르는 문라이트 팬케이크 하우스에서 만난다. 주문을 받는 마고와 주문을 하는 가스파르는 프레임 안에 위치해 있지만, 거울의 반사된 면을 통해서 가스파르의 모습은 앞면과 뒷면 모두 노출이 되어 있다. 때문에 속마음도 함께 노출된 느낌이 든다. 이분법처럼 나눠진 화면은 가스파르의 이중적 성향이 드러나는 듯하다. 7월 18일부터 시작된 여름은 8월 6일의 여름으로 마무리된다. 마고 역시 남자친구가 외국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상황 속에서 남겨진 자의 포지션에 놓여있다. 마고와의 지속적인 만남은 희미했던 레나의 존재를 더욱더 상기시킨다. 적극적인 마고와 다르게 가스파르는 마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가스파르의 지속적인 거절은 상황을 또 다른 국면으로 변화시킨다. 



마고에 이어 가스파르가 만나는 새로운 사람은 솔렌느다. 마고와의 만남은 걷고 또 걷는 대화 안에 부재하는 것들을 욕망하고 가장 가까워도 먼 느낌이 든다. 하지만 솔렌느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듯하지만 자신만의 선, 바운더리가 확실한 캐릭터다. 오히려 가스파르가 맘을 먹더라도 솔렌느가 저지하는 느낌이 든다. 미완성된 노래를 유일하게 불러주는 캐릭터인 솔렌느는 선원의 딸과 가장 닮아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가장 거침없고 파도의 성격과 닮은 솔렌느. 가스파르의 노래는 솔렌느에 의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즉 언어와 노래, 이름은 타인에 의해서 불리는 것이다. 가스파르는 여름휴가동안 숙소에서 자신의 노래를 작성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그 노래를 듣는 이는 처음 만난 솔렌느다. 레나를 위해 만든 노래가 솔렌느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방식은 에릭 로메르 특유의 유머 코드 같기도 하다. 


이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가스파르가 이야기하는 레나의 존재는 실재하는가. 프레임에 등장하지 않는 레나의 모습에 관객들은 지긋지긋함을 넘어서 존재론적인 의미를 상기시킨다. 존재하는 것은 맞을까. 어쩌면 가스파르의 망상인 것은 아닐까. 레나의 존재에 의심을 품을 때쯤 프레임 안에 등장한다. 하지만 레나와 가스파르는 무언가 잘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린다. 대화 사이에는 공백이 생기고, 걸음의 속도 또한 다르다. 그리워하던 대상을 직접 대면한 이후 그 관계는 더욱 부서진다. 레나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가스파르의 모든 결정이 미뤄진 이유는 레나이며 해변의 한가운데서 걷고 뛰기는 반복하는 두 사람은 쓸리고 밀리는 파도를 닮아있다. 어쩌면 네 사람은 모두 여름을 함께 보낼 사람을 찾는 외로운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 하나 없는 마음의 열기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다시금 우울해지는 것은 여름 이야기라는 제목과 결부되어서 언어의 공허함을 만들어낸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부재한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가스파르는 선택과 집중을 했어야 했지만 흘려보냈다. 8월 6일, 휴가의 마지막 날 가스파르는 전화를 받는다. 가스파르는 마고와 레나의 전화를 받는데 같이 휴가를 보내자는 말이었다. 그 이후에 8번 트랙 녹음기를 찾았다는 전화를 받는 가스파르는 지체 없이 녹음기를 찾으러 떠난다. 가스파르의 우선순위는 어쩌면 음악에 대한 갈증과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여름을 함께 보낼 누군가를 찾는 행위를 지속하면서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하지 못해서 엇갈린 마음들은 결국 응어리진 마음들만 남긴 채 미완성되었다. 마고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가스파르의 얼굴에는 무언가 씁쓸함이 남아있다. 


여름의 갈증과 갈망이 해소되지 못한 채,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캐릭터들의 마음은 에릭 로메르의 다음 이야기에서 풀릴 수 있을까. 에릭 로메르의 대사들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양면적인 성격을 지닌 인간을 자세히 포착하면서 언어가 지닌 거짓말과 눈속임을 표현하는 로메르는 과연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객관적인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진심을 이야기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에는 아니라고 대답하려 한다. 가스파르는 부재한 대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을 나열하였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진심은 왜곡했다. 그의 뒤틀린 마음을 스쳐 지나갔던 마고와 솔렌느는 레나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했다. 물론 레나 또한 음악의 자리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진실과 진심에 회의를 품는 캐릭터들은 외로움을 말 안에 꾹꾹 채워 담고 또는 눌러 담는다. 인물들 간의 거리는 심리적 거리와 실재하는 거리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여름과 해변은 소란스러운 마음들을 담아낸 이미지적인 표현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름 이야기에 담긴 말들은 해변의 소리에 묻혀 미완성으로 남게 될지도. 



* 이 글은 아트나인 아트나이너로 작성된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iframe_url_utf8=%2FArticleRead.nhn%253Fclubid%3D25494727%2526articleid%3D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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