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Dec 13. 2023

[D-19] 이해와 변명

247번째 글

이제 MBTI는 완전히 일상의 일부로 깊숙히 자리잡은 것 같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소소한 이야깃거리에서부터 팀을 짜거나 인원을 배치하는 근거 자료에 이르기까지, MBTI는 정말 다방면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 역시 낯선 사람과 만날 일이 생기면 자연스레 MBTI 얘기를 꺼내곤 한다. 가벼운 대화에 날씨 얘기나 여행, 음식 얘기를 꺼내듯이. 이렇게 한때의 유행으로 곧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MBTI는 이제 우리를 정의하고, 서로 친밀해지게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MBTI가 이렇게 일상 속으로 퍼지면서 좋은 점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MBTI라는, 서로 다른 성격 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소극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하다고 부정적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은 이제 'I'라는 그룹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교적이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이해를 받게 되었다. 부정적인 시각도 사라지고. 또 예전에는 서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오해하곤 했던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T'와 'F'라는 범위 안에서 파악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왜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특정 성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옅어진 것은 분명 MBTI의 장점이다. 하지만 내가 경계하는 부분은 MBTI에 대한 맹신이다. 특히 어떤 행동의 근거로 MBTI를 제시하며 합리화하는 것.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쏘아붙여 놓고 "내가 T라서 그래."라고 합리화한다거나, 문제가 될 만큼 충동적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P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개선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스스로를 어떤 카테고리로 정의해 놓고 나서, 그 카테고리에 들어맞는 스테레오타입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MBTI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또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내가 I 성향이라면, 나는 내가 내향적인 성격임을 파악하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편안함을 얻고 어디서 에너지를 충전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또 내가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다면, 그게 내 J 성향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다음이다. "나는 J니까 어쩔 수 없지 뭐."가 아니라, "나는 J니까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그럼 나는 계획이 틀어진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겠다."로 이어져야 한다. 나에 대한 이해는 개선의 자료로 사용되어야지, 이해가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때로는 나를 정의된 카테고리 내에서 묶어 두려고 할 때가 있다. 그게 편안하기 때문이다. 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데에서 오는 동질감과 안도감도 있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뭐든지 지나치면 독이 된다. 내가 나를 쉽게 이해하게 된 만큼, 때로 나는 그렇게 이해한 내 성격을 스테레오타입에 끼워 맞추려고 시도한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를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막게 되기도 한다. 이 부분이 MBTI를 활용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타인을 규격화하고 변명으로 사용하고 싶어한다는 점이 말이다.



/
2023년 12월 13일,
버스에 앉아 패딩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Jonas Jacobsson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20] 계획된 감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