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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Dec 14. 2023

[D-18] 순간으로 인생을 뜨다

348번째 글

나는 내가 길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목표든, 어떤 순간이든, 무언가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 위 어딘가에 내가 서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걷는 나날들을 그저 과정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중요하지 않고 소중하지 않은 평범한 날이라고 말이다. 정말 중요한 날, 내가 원했던 바로 그 순간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그 길 위의 순간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서 있었다.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았고, 도착했다 생각했던 곳이라도 잠시도 머무르지 않았다. 목표를 달성한다고 해서 길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순간 영화가 끝나듯 엔딩크레딧이 내려가는 게 아니었다. 게임 오버 문구가 뜨는 게 아니었다. 길은 언제나 계속해서 이어졌다. 목표를 달성한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그다음 순간들을 겪게 되었고, 그다음 일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이 무언가를 향해 걷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화살표가 그려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걷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되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때로는 내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도착하기도 했다. 문득 생각나서 뒤돌아 보면 내가 이미 지나쳐 온 길가에 내가 찾던 게 있었던 적도 있었고.


그동안 내가 이 길을 걸으면 언젠가 좋은 곳에 다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걸었던 그 길 위의 순간들은 결코 '과정'이 아니었다. 그 순간들은 내 인생을 이루는 한 코였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그저 의미 없는 시간들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도 똑같이 한 코. 뜨개질을 해서 내 인생을 엮어 내는 데에 필요했던 똑같은 양의 실일 뿐이었다. 나는 때로 빨간 실이 섞여 드는 그 순간을 위해 살아가려고 너무나도 많은 흰 실들을 놓치고야 말았다. 흰색으로 짜인 부분도 사실은 정말 소중한 순간들이었는데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떠 온 나의 인생과 앞으로 더 뜨게 될 나의 인생을 생각하며, 최백호의 노래 '찰나'를 떠올리고 있다.


빛나는 순간, 희미한 순간
그 모든 찰나들이
나의 삶을 가득히 수놓았음을

- '찰나' 중에서.




/
2023년 12월 14일,
소파에 앉아 유튜브로 잔잔한 음악을 들으.



*커버: Image by Anastasia Zhenina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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