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번째 글
어제 본 연극에서 나온 대사다.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하면서, 피라냐 떼를 예시로 든다. 누군가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사람들은 피라냐 떼처럼 몰려들어서 살을 죄다 물어뜯어 버리고 뼈만 남긴다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드러내면 안 된다고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나도 한때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냉소적인 생각을 했었다. 웬만해서는 사람을 믿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동물적인 본성을 갖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서열을 부여해 줄세우기하고, 자신의 서열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바로 공격이 들어올 거라고 여겼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방어하고 방어하고 또 방어했다. 내 약점을 절대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떤 관계가 내게 약점이 될까 봐 관계 맺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이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도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었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고, 약점을 가진 사람을 보듬어주곤 했다. 본능적으로 말이다. 끈끈하게 뭉친 사회를 만들고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게 생존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려 노력하곤 했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이 세상은 단순히 피라냐 떼라고 보기 어려웠다. 공격받고 비난받을 것을 감수하고 내가 내 약점을 꺼내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고 응원해 주었다. 비슷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 내게 공감을 보내기도 했고, 전혀 그런 약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기도 했다. 내가 피 흐르는 상처를 내보이자 사람들은 그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피라냐 떼처럼 달려들어 나를 잡아먹은 게 아니라.
물론, 나를 공격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서로를 공격하고, 그 공격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나 역시도 여전히 공격받을 것이 두려워 겁을 먹는다. 여전히 나는 내 부족한 점을 내보이는 것을 꺼린다. 여전히 나는 나를 그대로 보여줄 용기가 없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깨닫게 된 것 하나는,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 9명이 있다고 해서 1명이 나를 보듬어준 경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준 도움과 호의, 이해, 위로가 공격으로 인해 퇴색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 내가 느낀 온기와 위안이 증발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내게 더 중요한 것은 9명의 공격보다는 그 1명의 도움이다. 그게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파헤치지만 어떤 사람들은 꽃과 나무를 심는다. 그들이 열심히 가꾼 자리가 파헤쳐진다 해도, 그 꽃과 나무를 보면서 느꼈던 행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파헤쳐진 자리에 분명 누군가는 씨를 뿌려 줄 것이다. 내가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그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물을 주는 것이다. 파헤쳐졌으니 아무 의미 없다고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니라. 파헤쳐진 자리에는 꽃을 다시 심으면 되니까. 다시 파헤치기 어려울 만큼 깊이 뿌리내린 아름드리 나무를 자라게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