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여름, 프랑스 알자스 지방으로의 조금 특별한 여행길에 올랐다. 그때 나는 승마라는 운동을 시작한지 6개월 정도밖에 안된 ‘승린이'였다. 귀족스포츠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빠른 속도로 나의 통장을 갉아먹었지만, 승마는 내 인생의 새로운 낙이었다. 한두시간 말을 타고 나면 한 겨울에도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동 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마시는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은 지상낙원으로 가는 특급열차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 알자스에는 승마학교가 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바로 그곳이었다. 초보자들도 참여할 수 있고 영어가 통한다는 점이 큰 메리트였다. 또 한가지 이곳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아닌 리슬링으로 유명한 알자스 지역이라는 것. 게다가, 승마학교에서 제공하는 모든 식사에 와인을 비롯한 주류가 ‘포함' 사항이라는 것!
승마학교가 있는 곳은 벨몽이라는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알자스의 메인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서도 차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일주일동안 보금자리가 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경. 곧 식사가 시작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승마학교 직원이 안내해준 저녁식사 타임은 8시였다. 그리고 그 전에 ‘아페리티프'는 7시반부터 시작된다는 부연 설명이 따라왔다.
아페리티프(apéritif)는 프랑스어로 식전주 혹은 식전주를 마시는 시간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식욕을 돋군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줄여서 ‘아페로'라고 한다는 이것은 바로 식사를 기다리며 가벼운 알콜을 즐기는 시간이다. 사실 식전주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문화다. 아무래도 음식과 와인을 사랑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그것이 특히 더 잘 알려져 있을 뿐. 본격적인 저녁 장사가 시작되기 전, 레스토랑이나 술집에서 주류를 할인해 판매하는 시간대인 ‘해피아워'도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샤워로 여독을 풀고 짐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7시반을 지나고 있었다. 아페로가 시작될 시간이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낯선 외국 사람들 사이에서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혼자 숙소에 마냥 쳐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식사와 (주류를 포함한) 음료가 제공된다는 설명에 아무런 비상식량도, 지금 이 허전함을 채워줄 와인 한병조차 사오지 않았던 것이다. 두려움과 어색함보다는 배고픔이 더 강하게 나를 엄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와인 한잔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쭈뼛거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커다란 프레즐이 열매마냥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무엇을 마시겠냐는 질문에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와인을 부탁했다. 정말 무제한으로 주는 건지 약간 미심쩍었지만 두번째 잔도 기꺼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곧 의심을 거두었다. 소금만 약간 뿌려진 담백한 프레즐은 아페로와 함께 허기를 달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옆자리에는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중년의 부부가, 한쪽에는 커플끼리 짝을 맞춰 여행 온 프랑스 청년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낀 나는 여전히 어색해하며 와인만 홀짝거렸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네덜란드 아저씨의 넉살좋은 인사를 시작으로, 다들 이곳의 유일한 아시아인이자 혼자 여행을 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왜 이 프랑스의 외진 산골마을까지 말을 타러 왔는지 궁금해했다. 한두잔의 아페리티프는 오늘 처음 만난, 국적도 생김새도 다른 이들 사이에 흐르던 차가운 공기를 금새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이었다.
아페리티프는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식사 전에는 항상 아페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어라마셔라 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언제나 한두잔,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주류가 ‘포함'이라는 의미는 술을 무한정 마실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글자 그대로 식사에 와인이 ‘포함'돼 있다는 뜻이었다. 이걸 ‘알콜 무한리필'로 해석했던 것은 나뿐이었다.
식당 한켠에는 생맥주 기계가 설치돼 있어서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따라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항상 ‘와인(vin)’이었다. 알자스에 온지 사흘쯤 되자, 이제는 직원들이 나만 보면 ‘vin?(와인 줄까?)’이라고 할 정도였다. 아페로 타임에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당연히 화이트 와인을 의미했고, 이곳에서는 곧 지역 와이너리의 리슬링이었다. 그 때 주로 마셨던 리슬링은 상큼하고도 조금은 단 맛이 강했다. 아직 약간 서늘하고 까끌까끌한 초여름 유럽 날씨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리슬링이었다.
낮술이나 깡술(?)을 금기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한 안주도 없이, 밥도 먹기 전에 술부터 한 잔 하는 것이 낯설고 이상한 문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된 하루를 보내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시원한 샴페인 한잔, 혹은 생맥주 한잔이 아니던가. 아페리티프는 단지 식욕을 돋구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적어도 알자스에서 경험했던 아페리티프는, 바쁘게 흘러가던 시간을 멈추게 하고 인색한 마음의 경계를 풀게 하는 마법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