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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신부인 Jan 21. 2024

임산부가 폭설지역에서 살아남는 법

겨울철 복직자의 운명

1년간 장기 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나의 근무지는 강원도다. 

결코 기다리진 않았지만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어 복직했던 날, 눈이 내렸다.

그 다음날도 내렸고 그 다음날 또 내렸다. 

사실은 어제도 내렸고 무려 대설주의보 발령으로 도로까지 삼엄하게 통제되었다. 

오죽하면 2월까지 진행하는 2024 강원동계청소년대회까지 차질이 있었겠는가!

복직한 이래, 근무한 날과 주말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보냈던 날 중에 7할 이상은 눈이 내렸다고 보면 된다.


수도권이나 그 아래 상대적으로 온난한 지역에서는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 지역은 4월에도 눈이 내릴 수 있는 곳이다. 

휴직 전 몇 년간 근무하면서 직접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어 영상까지 촬영했던 기억이 있다. 

오래 근무한 분들에게 물어보니, 5월 5일 어린이날에도 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짧게 겨울철 여행지로 강원도를 선택해서 온 관광객들은 환영의 쾌재를 부를 만 하다.

스키, 썰매, 보드 등 겨울 레포츠를 즐기는 이들에겐 천혜의 환경이 따로 없다.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바라고 온 분들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근무자로 이 지역에 머물러야 하는 임산부인 나는 고뇌의 기로에 서 있다. 

부디 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기를!

제발 넘어지지 않고 미끄러지지 않고 출산휴가의 그 날까지 버틸 수 있기를!


수태한 지는 4개월차를 넘어, 어느새 5개월로 향하고 있다.

슬슬 배가 나오기 시작했고, 배꼽 아래엔 갈색빛 임신선이 생겼으며, 

두꺼운 겨울 외투를 벗고 몸에 피트되는 옷을 입으면 누가봐도 영락없이 임신부로 보인다.

안정기를 지나고 돌아온 것에 그나마 감사할 따름이다.

입덧약은 결국 끊는데 실패했지만, 16주차가 넘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진정되고 있다. 

그러니, 무사히 이 겨울을 나고 뱃속 태아를 무사히 지켜내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 되겠다. 


일하는 임산부로 몇 주를 겪고보니, 직장 환경과 조직 분위기의 중요성을 몸소 체감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65조(사용 금지) ① 사용자는 임신 중이거나 산후 1년이 지나지 아니한 여성(이하 “임산부”라 한다)과 18세 미만자를 도덕상 또는 보건상 유해ㆍ위험한 사업에 사용하지 못한다.

제70조(야간근로와 휴일근로의 제한) ② 사용자는 임산부와 18세 미만자를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의 시간 및 휴일에 근로시키지 못한다.

제74조(임산부의 보호) ⑤ 사용자는 임신 중의 여성 근로자에게 시간외근로를 하게 하여서는 아니 되며, 그 근로자의 요구가 있는 경우에는 쉬운 종류의 근로로 전환하여야 한다.

제74조의2(태아검진 시간의 허용 등) ① 사용자는 임신한 여성근로자가 「모자보건법」 제10조에 따른 임산부 정기건강진단을 받는데 필요한 시간을 청구하는 경우 이를 허용하여 주어야 한다.
② 사용자는 제1항에 따른 건강진단 시간을 이유로 그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여서는 아니 된다.


정말 감사하게도, 나의 직장은 '임신, 출산, 육아휴직' 관련 일·가정양립 지원제도 사용에 관대한 곳이다. 

남성 직원이 1년 넘게 육아휴직을, 그것도 최대 한도까지 쓴다고해도 불이익이 없다.  

제도가 구축돼있어도 눈치를 봐야하고 사용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면

아마 복직하지 못하고 경력단절이 되었거나 혹은 산전 육아휴직을 쭉 이어서 써야만 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보호가 필요한 대상은 배려해줘야지' 하는 분위기가 조직 전반에 합의가 돼 있다. 

부서장은 타 팀원에 비해 내가 고참임에도 불구하고, 쉬운 형태의 근로로 알아서 배정해주었다.

이에 대해 팀원들도 불만, 불평이 없이 그럴 수 있지- 라며 수긍하였다. 

근무지에 눈이 많이 쌓여 제설 작업을 하러 가야 할 때도 나처럼 몸이 약한 직원까지 동원하지 않는다.

공용 공간 중 먼지가 날릴만한 곳에 가야할 때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팀원들이 먼저 사무실에 있으라고 한다. 

인사부서에서는 당직이나 비상 근무자를 배치할 때 나를 순번에서 알아서 제외해주었다. 

사업부서 특성상 주말, 휴일 근무가 필요할 때에도 나는 예외 대상으로 빠져있다. 


어쩌면 이 모든 배려와 제도 덕분에 태어날 아이를 무사히 지킬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날씨가 궂은데 일하는 곳까지 삭막했다면 버틸 재간이 없었으리라.

직장 내 제도와 조직 분위기가 잘 받춰준다면, 임산부라도 폭설 혹한기 근무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현재에는 모든 곳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다가올 미래에 수많은 직장이 일가정양립 지원제도가 잘 정착되고 조직 내재화까지 잘 이뤄진다면,

오늘날같은 저출생 현상에 희망이 있으리라고 본다. 


#복직 #임산부 #워킹맘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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