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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면 어딘가 창문은 열린다』

「구십의 세월이 전하는 인생 수업」

by 안서조

이 책의 부제목은 「구십의 세월이 전하는 인생 수업」이다.

구십 세가 거의 된 작가가 쓴 책이다. 지은이의 현역 시절 주된 직업은 언론인(기자)였다. 책 중에서 공감 가는 부분을 옮겼다.


인간은 언젠가는 자신의 손으로 일군 모든 것을 잃는다.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까지도 잃어야만 한다. 아마도 머잖아 나는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꿈꾸는 법을 망각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 거라고….


인간이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게 없는 표정을 그가 지을 줄 알기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그는 스스럼없이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사람 비위를 상하지 않게 만드는 능글능글한 궤변, 상대가 감추고 있는 능력과 재능을 판단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드러난 표정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 낼 줄 아는 처세를 시기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다시 없을 진실이며, 아무 데로도 도망갈 곳 없는 완벽한 절망이다. 당장 내일 아침이 되었을 때 내가 살아있으리라는 확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 느낌은 청춘이 겪는 막막함과는 궤가 다르다. 목전까지 어둠에 잠식되어 삼켜지기 직전의 답답함이다. 살아 있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 귀찮고 쓸모없게 느껴지는 이 권태는 누구든지 한 번쯤은 겪게 된다.


발목은 잡는 것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다. 내가 견뎌낸 과거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 그 둘이 나의 오늘을 볼모로 잡고 언제까지나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속이면서도 희망을 노래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삶의 무게가 허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의지가 되는 남편으로 남아야 하고, 지친 아들을 넓은 가슴으로 안아줘야 한다는 의무가 내 삶의 속성보다 우선시 되는 것을 목도 할 때, 나는 파렴치한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가족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무한한 우물과 식량으로서의 자격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내 경우에는 오늘 하루의 감정에 충실 하려는 이기심이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사랑에서 상대를 배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은 독점욕이다.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다. 그 욕심에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면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것이 행복이다.


오늘과 내일을, 지나간 시간을, 이미 겪어버린 이들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십 년 후의 나를 상상한다. 내일 아침 눈이 떠질지 안 떠질지 모르는 나이가 됐어도, 반쯤은 죽음에 잠식당한 몸이 됐어도, 십 년 뒤에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십 년이라는 세월, 3650일이라는 날짜, 그리고 87600시간은 흐른다. 미래는 십 년 후가 아니다. 3650일 중 어느 한 날도 아니다. 87600이라는 시간은 이미 시작됐고,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이다.


미래는 오늘이다. 미래는 매 순간 나를 찾아낸다. 끝없이 나를 발견하는 미래이기에, 나는 모든 순간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부과할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 인간이 미래를 계획하는 이유는 십 년 후의 나를, 지금으로부터 십 년 후에 만날 내가 아니라, 이 순간부터 앞으로 십 년간 매 순간 조우 할 나의 모습을 원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제일 적게 한 생각이 뭘지 고민해 봤는데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해본 것 같다.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축복받은 인생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행복하진 않았어도 불행하지도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인간은 가져보지 못한 것들만 상상한다. 질병은 건강한 몸을 원하고, 가난은 돈이 궁하지 않은 생활을 원하며, 고독은 서로 이해하며 살아갈 배우자를 원한다. 그런 사람이 되면 그땐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될까? 그런 사람이 됐음에도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식고 입맛이 씁쓸하다면 그땐 어떡해야 하나.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다음에는 뭐가 남을까? 남은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나가야 할까? 채워나갈 것들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 가서 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몸이 건강해졌는데, 가난에서 벗어났는데, 누군가로 인해 더 이상 외롭지 않은데, 그 순간이 또 다른 허무와 상실로 느껴진다면 그때는 무엇을 더 원해야 할까?


최악의 악몽은 이루지 못한 꿈이 아니라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걸 바라보며 두려움과 조급함 대신 다 이룬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무서운 꿈이었다.


인생 말년에 베토벤은 메모지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운명이여! 그대의 힘을 드러내라.

내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가르쳐준 것은 네가 아니더냐.

너는 내게서 청력을 앗아갔다. 너는 내게서 사랑하는 연인을 앗아갔다.

그러나 너는 나를 아직도 꿈꾸게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용서하련다.


희망처럼 잔인한 선물은 없다. 나처럼 죽음을 앞두고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색이다. 모두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색이다. 모두가 희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전에 자기가 무엇을 희망하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희망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나의 변화 뿐이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내 모습. 그 모습을 희망할 수 있는 유일한 하루. 그날이 오늘임을 감사히 여길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던 일의 전부였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한다면 타인을 위한 희생을 손해로 계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의 몫을 양보하더라도 괴롭지 않다. 내 것을 조금 나눠주더라도 거만해지지 않는다. 불만은 가진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뭐라도 가졌기에 나보다 더 가진 자들과 나를 비교하고, 그들보다 못 가진 나를 비하하고, 나보다 더 가진 그들을 격하시킨다.


세상은 언제나 불평등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삶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평등한 시대에는 항상 반역이 일어나거나 민란이 터지거나 혁명이 등장했다. 그때의 불평등은 생사가 걸린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불평등도 구조적 모순과 폐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니다. 생사가 걸리지 않은 불평등이라면 원인은 한 가지, 비교다.


용서가 사라진 세상이 두렵다. 신의 존립 여부에 상관없이 인간에겐 종교가 필수다. 종교는 다른 말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힘을 빌려서라도 우리에겐 용서가 필요하다. 종교라는 강압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 줘야 한다. 그래야만 본성에 도사리고 있는 증오와 원망을 억제할 수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몸을 씻듯 용서를 통해 마음에 묻은 때와 오물을 씻어버려야 한다.


사람과 인생이 지겨울 때가 있다. 다 알게 된 듯하고 더 없는 듯하여 이제는 끝이겠거니 마음을 접으려 하지만, 세월은 여전히 흐르고 사람은 여전히 그립다. 그게 산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안고 자연의 품에 의탁해서도 남쪽으로 창을 내놓고 한적한 풍경 너머로 누군가가 다가와 주지 않을까 기다리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한 가지 좋은 점이 생겼다면 솔직해져도 예전처럼 부끄럼을 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자연이 좋아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자연은 삭풍에 황량해진 제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찬란한 녹음을 자부하지도 않는다.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은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위험한 곳에서 ‘부모’라는 존재는 나만큼이나 나약하고 위태로운 존재다. 머잖아 늙어 쓰러져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될 잠재적 약자다. 지금 당장은 부모가 입혀준 금박 옷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나를 존중 해주는 것이 기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부모가 입혀준 흙 묻은 넝마가 부끄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타고난 배경이란 어차피 벗어 던져야 할 무거운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사슬이 낡아 해어졌을 때, 사슬 속에 숨겨둔 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삶이라는 단어보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나의 오늘이다. 남은 목표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짓게 될 표정, 마지막 말들과 흘릴 미소, 영원한 안식에의 도달을 스스로 계획하여 실천할 수 있겠는가, 라는 가능성의 증대로 집약된다. 갑작스레 정신을 잃고 싶지는 않다. 밥 먹고 편안히 낮잠을 자다가 조용히 눈을 뜨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죽음을 의식하고 싶다. 몸과 정신이 죽어가는 과정들을 경험하고 싶다. 아픈 이별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싶다. 육신이 마지막 소원을 버티어 낼지는 미지수다. 삶이 그러했듯이 죽음도 뜻대로 좌우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내 나이라면 죽어도 호상이라느니, 천수를 누린 것 아니냐는 말들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는다. 나의 오늘은 그간 경험했던 수많은 ‘오늘’과 바꾸지 못할 단 하루다. 갓 태어난 생일날의 오늘, 스무 살의 오늘, 마흔 살의 오늘, 여든 살의 오늘은 전혀 다르지 않다. 어제보다 못하고 내일보다 덜 소중한 오늘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감히 입에 담지 못한다. 그따위 거짓말로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나는 더 살고 싶은 것이다. 계속해서 무엇인가 뜻깊은 상황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오늘을 반복하고 싶다.


톨스토이가 남긴 그 많은 책보다도 그의 죽음이 나에게 더 큰 진실을 가르쳐준다. 나는 지금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병은 사라지고 장수만 남았다. 아픈 장수는 행복하지 않다. 더구나 그 아픔은 내 육신의 아픔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족과의 불화, 장수에 소모되는 경제적 갈등….


인류 역사상 노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한 첫 번째 주인공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이 거룩한 성자는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간에게는 요람기,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중년기, 노년기가 있다. 늙어가는 인생에 후회와 슬픔, 미련 같은 고통이 더 해지는 까닭은 나이가 들어 몸에 병이 생겨서가 아니라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은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진다.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자는 나이에 상관없이 나날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아내는 천성이 화려한 사람이다. 늘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활동량이 엄청나다. 반대로 나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누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나는 아내처럼 타인의 입장에 공감하여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했고, 아내는 나처럼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젊어서의 싸움은 술과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발생하는 갈등과 혐오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심각한 말로 각자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각자의 차별화된 개성이 충돌하여 발생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아내가 될 수 없고, 제아무리 이해해 준들 아내는 나를 대신하지 못한다. 이것은 당연한 차이인데도 부부관계에서는 특히 나이 든 부부에게는 넘지 못할 거대한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서로의 활동에 무관심해졌다고 해서 상대의 애정까지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유대를 원한다. 무관심은 서로에게 화가 나서 내뱉는 막말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준다. 더는 나에게 화를 내지도 않는다는 실망감이 줄어든 대화만큼이나 생활을 빈궁하게 만들었다.


장염에서 출발한 작은 세균들이 사람의 몸을 훑어 쓰러뜨리듯 우리네 인생은 보기보다 연약해서 아주 미세한 금만 가도 어느 순간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앞만 보며 걸어가다간 그 상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처음 금이 간 곳이 어딘지도 추적하지 못한다. 장염에서 시작된 패혈증이 뇌염이라는 치명상으로 전이되듯, 배탈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듯, 인생에서도 작은 상처를 감내하지 못해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관대해진다. 산다는 것은 결국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이다. 특별히 얻은 것도 없고, 크게 잃은 것도 없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힘들게 살았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기나긴 꿈을 거창하고 허황하지만, 내 뜻과는 상관없었던 악몽과 흉몽의 중간쯤 되는 비몽사몽간에 나는 어느덧 팔십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다. 이런 내가 성공과 실패라는 담론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나의 소원은 크지 않다. 안전하게 죽기를 바란다. 아마도 모든 인생이 그러할 것이다. 나도 겉으로는 그게 다가 아닌 양, 인생에 다른 뭔가가 있는 것처럼 떠들고 다니지만 그건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를 외면할 수 없어 그렇다고 수긍해 주는 것일 뿐이다. 내가 경험한 진실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안 좋지만, 성공해도 안 좋을 수 있는 확률이 반, 실패해도 좋을 수 있는 확률이 반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미련 갖지 말기를 바란다. 잘 풀렸다고 까불지 말고, 더럽게 안 풀린다고 세상을 원망해서도 안 된다. 지나고 보면 다 쓸데없는 마음이다. 지나고 보면 인생이란 무조건 좋다. 죽지 못해 살았던 그 시절마저 지나고 보면 그립다. 그 오욕의 한철을 견뎌낸 나 자신이 너무나도 예쁘고 자랑스럽다. 인간은 언제 어느 때나 스스로를 기만하며 자기 자신의 존엄을 손수 가꾸는 자기애의 표본이다. 교만과 과시는 인성의 근본이다.

삶이란 관점이다. 관점이 삶을 따라가진 않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는가. 왜 그곳을 바라보는가.

나는 지금도 사는 이유를 모른다. 절망은 매일 밤 발밑에서 뱀처럼 스멀거린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꿈을 꾼다. 삶에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과일이 익기 위해 계절이 필요하듯, 삶이 무르익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헛된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널린 수많은 이름 가운데 하나도 아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라는 사람으로 세상에 기록되고 싶다.


책 소개

『문이 닫히면 어딘가 창문은 열린다』 김욱 지음. 2024.10, 30. 서교책방. 278쪽. 18,000원.

김욱.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에서 공부 서울신문,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 언론에서 일했다. 번역가. 저서,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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