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면 같은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궁금하다. 늙음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죽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족과의 관계는? 평소 먹던 음식 특히 술은 어떻게 하는지 … 등, 등. 이 책을 읽은 이유다.
이 책은 83세에서 3개월이 지난 네덜란드의 헨드릭 흐룬의 일기다. 2013년 1월 1일에서 12월 31일까지 연재되었다. 우리나라의 요양원과 실버타운이 혼합된 형태로 짐작되는 네덜란드 양로 시설에서 살고 있는 헨드릭의 솔직한(?) 일기는 전에 읽었던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연상케 한다. 유쾌하고 통렬한 문체의 책을 읽으면서 미친놈처럼 혼자 큭큭거렸다. 너무 재미있었다. 늙은이 생활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실감 났다.
12월 31일 일기는
“올해는 무척 멋진 한 해가 될 수도 있었고, 일부는 멋졌다. 하지만 마지막에 벌어진 일이 최종 판단을 기울게 한다. 나는 반세기 전에 만났으면 좋았을 사람을 만났다. 이제 나는 멋졌든 8개월과 무척 슬펐든 2개월을 가지고 살아 나가야 한다. 행복한 하루를 보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가지려 노력해야 하고, 전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가끔은 힘이 충분치 않을 때도 있다.
새해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놔두지는 않을 거다. 봄을 향하여 가는 거다! 그런 다음에는 와인 생산국을 향해 가는 거다! 우리가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어쨌든 불안한 마음은 덮어 두자. ‘늙었지만 죽지 않아’ 클럽은 이 이름을 지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한 모임에 불과하다. 계획이 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 새 일기장을 사러 가야겠다.”로 끝난다.
흐룬이 살고 있는 복지 센터에는 160명가량 산다. 네덜란드 북부 암스테르담 양로 시설이다. 간호 병동이 연결돼 있고, 그곳에는 정신이 완전히 나가거나 심각한 손상을 입은 노인병 환자 80여 명이 수용되어 있다. 숫자를 정확히 대지 못하는 이유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오가느라 문이 계속 빙빙 돌기 때문이다. 추산컨대 이 시설에 도착한 사람들이 평균 5년 정도 사는 걸 감안하면 복지 센터와 간호 병동을 합쳐 연간 50여 명이 죽는다고 보면 된다. 만약 여기서 아주 늙어서까지 두 발로 서서 다닌다 치면 인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500건 정도의 매장 내지는 화장에 참석해야 한다. 멋진 삶이다.
흐룬은 복지시설에 오기 3년 전에 멋진 테라스가 있고 넓은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살았다. 때가 되면 거기서 평화롭게 죽을 계획이었다. 흐룬의 아내는 40년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딸이 익사한 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놓았다. 정신병원에서 몇 달을 보내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다 마침내 집에 불을 질렀다. 흐룬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였다. 화재가 난 뒤 정부에서 주선해 준 이 시설에서 살게 되었다.
시설은 7층짜리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다. 가운데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두 개 동으로 나뉘었다. 각 동에 창문이 없는 긴 복도가 설치되어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주방이 딸린 방 한두 개짜리 ‘연립주택’이 여덟 개가 늘어서 있다. 주방은 아래위로 각각 두 개씩 설치된 찬장과 1미터 길이 조리대, 그리고 차나 커피에 넣을 물 또는 우유 정도 데울 수 있는 가스레인지 열판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샤워장과 화장실도 있다.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수 있는 곳에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고 문지방이 없다. 각 주택에는 쓰레기통을 놓고 제라늄 화분을 매달아 놓을 만한 넓이의 발코니가 있다. 각 동의 맨 끝에는 소파와 의자가 놓인 온실 비슷한 공간이 있다.
1월 2일 일기에서 흐룬은 자기소개를 한다. 나 헨드리퀴스 헤라르뒤스 흐룬은 참된 시민이고, 분위기도 잘 맞추고, 친절하며, 예의 바른 데다 남들을 기꺼이 돕는 늙다리다. 진짜로 그런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남과 다르게 행동할 배짱이 없어서 그렇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적이 좀체 없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가장 덜 부딪치는 길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내 장기다. 모두를 기쁘게 하려는 것 말이다. 부모님이 내 이름을 핸드릭이라 지으셨을 때 당신들께선 앞날을 보신 게다. 그보다 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름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어쩌면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지, 사실 그거야 내가 손쓸 수 없는 일이다. 그럴 경우 내 친구 에베르트 다위커르에게 장례식에서 이 일기를 몇 페이지 낭독해 달라고 부탁할 셈이다. 나는 깔끔하게 빨아서 다린 옷을 입고 ‘지평선 화장터’에 있는 작은 교회에 누운 채 에베르트가 목쉰 소리로 불편한 침묵을 깬 다음 아직 영문을 모르는 조문객들에게 일기에서 고른 몇몇 구절을 읽어 주길 기다릴 것이다. 걱정이라곤 딱 하나다. 에베르트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어쩐다?
고된 날이었다.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린다. 쇠락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몸이 나아지는 일은 예정에 없다. 머리카락이 갑자기 도로 자라기 시작할 리도 없을 것이다. 동맥이 저절로 깨끗해질 일도 없다. 혹과 종기도 사라지지 않을 거고, 아랫도리에서 찔끔찔끔 떨어지는 오줌이 멈출 일도 없을 거다. 무덤으로 향하는 편도 차표, 그거다. 절대 젊어지지 않는다. 단 하루도, 한 한 시간도, 단 1초도. 내 기분이 침울한 상태라는 거 나도 안다. 인생의 황혼을 즐겨야겠지, 하지만 빌어먹게도 그게 늘 쉬운 건 아니다.
요즘 내가 걸을 수 있는 범위는 편도 기준 약 500미터로 중간 지점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쉰다. 그 이상은 힘들다. 세상이 줄어들고 있다. 여기서 출발하여 왕복 총 1km를 네 번으로 나눠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
시설 원장인 스텔바헌 부인-앞으로 이 여자에 대해 할 말이 엄청 많을 것이다. 십중팔구 그럴 거다-이 에너지 절약 조치를 발표했다. 입주자 방의 온도 조절 장치를 23도 이상으로 설정하면 안 된다. 노인들은 추으면 그냥 코트를 입어야 한다. 그게 내용이었다.
그의 철학인즉슨, 살아가는 동안 유일하게 중요한 건 가능한 한 즐겁게 시간을 죽이는 거란다. 그러기 위한 비결은 만사를 뭐든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나. 난 그 친구가 부럽다. 하지만 나도 배워야 할 건 빨리 배우는 사람이지.
오늘날 괴롭힘은 학교에서 일어나건 인터넷에서 벌어지건 언론의 단골 소재다. 하지만 노인 시설에서 벌어지는 으름장에 대해서는 거의 못 들어 봤을 거다. 버젓한 노인 연금 생활자가 괴롭힘을 당할 리는 없을 테니까! 틀렸다. 하루만 여길 돌아보면 알게 될 거다. 여기에도 이 분야의 진짜 전문가들이 있다.
출퇴근도 없고 매일이 똑같은 곳에서는 요일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물론 직원들이야 일을 하지만 그 사람들로도 날마다 같은 일을 하긴 매한가지다. 일요일만 다르다. 아침에는 입주자 4분의 3이 교회에 가고, 오후에는 자녀들과 손자들이 방문한다. 그게 사람들이 바깥세상과 접촉하는 유일한 기회다.
2월 20일, 수요일
‘늙었지만 죽지 않아 클럽’ 창립총회가 열렸다. 굉장한 창립총회였다. 엄청나게 의욕적이었으며, 노인들치고는 술도 많이 마셨다. 길고 활발했던 회의 끝에 만장일치로 강령을 채택했다. 여섯 명이 월요일 오후에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은 건 참으로 절묘했다. 모두 유쾌하고 지적인 사람들이었고, 가장 중요하게도 투덜이가 없다.
내가 보기에 늙어간다는 건 아기가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길을 따른다. 방향만 반대일뿐이다. 사람들은 육체적 독립을 누리다가 점점 더 타인에게 의존한다. 인공 고관절, 바이패스 수술, 여기저기 듣는 알약, 그래 봤자 쩍 갈라진 금에 종이를 덮을 뿐이다. 죽음이 너무 늦게 오면 기저귀를 찬 채 코에서 콧물이나 줄줄 흘리며 더듬더듬 지껄이는 늙다리 갓난아기가 되고 만다.
0에서 80에 이르는 항해는 경이롭고, 도전적이며, 흥분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자기 길을 막 개척하려는 팜이다. 40세 즈음에는 힘세고, 건강하고, 정력적이다. 인생의 전성기다. 슬프게도 대개 사람들은 쇠락이 이미 조용히 느릿느릿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다.
시야는 좁아지고 인생은 공허해진다. 매일의 목표와 야망은 차 한 잔과 비스킷으로 축소된다. 아기 딸랑이의 늙은이 버전인 셈이다.
그녀는 하느님에게 4월 30일까지 살아남게 해 달라고, 더불어 새 교황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왔다. 심지어 내게도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부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느님이나 나나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 지가 꽤 됐다.
아침에 열쇠를 찾을 수 없었다. 방을 몽땅 뒤엎었다. 작긴 하지만 침대 벽장도 뒤집어 봤다. 다행히 그렇게 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 시간쯤 수색했을 거다. 그러다 결국 냉장고 안에서 열쇠를 찾았다. 넋이 빠져 가지고는, 늙은이들은 애들처럼 항상 물건을 잃어버리지만, 그들에게는 더 이상 어딜 찾아보라고 말해 줄 엄마가 없다.
의사는 나쁜 소식이 있지는 않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딱히 좋은 소식도 없었다. 꽤 많은 장기가 유효기간이 다 되었거나 이미 지났다. 관절은 불안할 정도로 마모된 상태고, 전립선은 수선 불가능이며, 타르가 잔뜩 쌓인 폐는 절반밖에 힘을 못 낸다. 심장도 안 좋다. 그나마 대행인 건 정신이 말짱해서 이런 쇠락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거다. 알츠하이머의 전조는 없다. 기껏해야 그 나이대에 보통 있는 자잘한 건망증뿐이다.
즐거운 금요일이다. 젊었을 때 우리는 오후 3시가 되면 가난한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느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련다. 만약 오늘 오후 3시에 내가 100m를 12.4초에 주파할 수 있게 되면 나는 회심하여 성모마리아 교회의 품에 안기겠다. 약속이다! 현재 내 100m 달리기 최고 기록은 1분 27초다. 어제 오후 3시 화창한 금요일에 직접 재 봤다. 1분 30초 정도를 달리고 나서 회복하려니 5분 동안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하느님은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이 숨을 거둔 바로 그 시간에, 당신께서는 내게 예전의 그 날렵한 발놀림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당신께선 교회를 향한 내 마음에 작별 키스를 날린 게지.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성인이 되어 60세에 이르기까지는 다른 무엇보다 젊음을 유지하길 원한다. 하지만 정말로 늙어 버리면 성취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곳의 삶은 공허함의 정수다. 더 이상 목표는 없다. 통과할 시험도 없고, 올라갈 사다리도 없으며, 키울 자녀도 없다. 심지어 손자들을 돌보기에도 너무 늙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약 100번 정도 웃는다. 어른들은 겨우 열다섯 번 웃는다. 그런 식으로 쭉 가다가 우리 나이가 되면 웃는 성향 자체를 잃어버린다. 이건 연구 조사로 나온 통계다. 노인들이 별도의 범주로 취급되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에 상응하여 웃는 능력이 사라진다.
나나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때, 그게 사실은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는 고통스러운 자각이 종종 든다. 그저 예의 바르게 굴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여기서 웃고 저기서 미소를 짓는다. 친근한 표정을 지으려고, 또는 재미없다는 마음을 드러내기에는 줏대가 없어서 웃는 것이다. 그도 아니면 대화 주제를 회피하려고 웃는다.
우리 달력은 깨끗하니까. 오늘도, 내일도, 남은 올해 전부 다. 세상 남는 게 시간이다. 한때는 일정이 겹친다며 불평했다. 이제는 진료 예약 말고 달력에 뭐 좀 쓸 게 있으면 황홀해한다.
얀 후에이마커르스라는 노인병 교수의 목표는 사람들이 잔병치레 없이 노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후에이마커르스는 무척 낙관적인 사람이고, 이미 쥐를 가지고 훌륭한 연구 결과를 얻어 냈다. DNA를 특별한 방식으로 다룬다든가 그랬다. 지금부터 10년쯤 뒤에는 노인들이 겪는 온갖 문제를 한 방에 치료하는 기적의 알약이 나올 수도 있겠다.
우리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지만, 세상의 시간을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둘러야 하지만, 서둘러야 할 만한 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내가 날 알아봤는지 확신이 없지만, 늘 그랬듯이. 할 말이 많지는 않았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사소통이 없다 해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심오한 감각이 있게 마련이다. 감동적인 동시에 무척이나 슬픈, 그런 감각.
“나는 그걸 볼 수 없을 거야”라는 말은 작은 방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90대 노인들에게 그리 터무니없는 가설이 아니다.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은 완전히 외면한다. 사람들에겐 그저 소소한 불만들만이 문제 될 뿐이다.
한 나라의 문명 수준은 노인과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측정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시안적이고 무례한 노인 복지 삭감으로 인해 백발의 포풀리즘이 창궐하는 비옥한 토양이 일구어지고 있다. 세계에서 부유한 국가 중 하나에 살고 있는데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을 돌보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64%의 노인이 일단 충분히 살고 나면 인생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끝낼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14%는 삶이 자연스럽게 끝나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관두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리라는, 고통과 비참이 점점 더 강해지리라는 두려움이다.
노인들의 질투심은 때로 어처구니없을 만큼 길게 지속된다. 여기는 여자들이 지나치게 많다 보니 결혼한 여성은 자기 남편이 시야에서 벗어나는 걸 싫어한다. 자기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여성에게는 사나운 경비견처럼 그르렁거린다. 남편은 질투심 많은 부인의 전방위적 감시를 감내해야 한다. 가끔 그의 눈에서 죽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느껴질 때가 있다.
모든 걸 고려해 볼 때 우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건 현명함보다는 순전히 운 때문이다. 인류가 언제나 양식 있는 사람들을 권좌에 앉히지는 않는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 그냥 이렇게 몇 명만 언급해 봐도 그들 사이에서 무려 2억 명의 사망자가 나오는데, 이건 핵폭탄은 셈에도 넣지 않은 거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지구의 인구가 20억에서 70억으로 치솟았다. 한 세대 만에 세계 인구가 세 배 이상 뛴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세계가 목도한 가장 격렬한 변화가 아닌가 싶다. 산업혁명보다도, 디지털 혁명보다도 훨씬 중요한 변화.
이렇다 할 사생활도, 개인 소유물도 없이 병실 하나에 같이 누워 있는 세 명의 늙은 여자.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국가 중 한 곳에서, 이토록 삭막한 시설이라니.
일기는 ‘끝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삶에 대한 의욕으로 마무리된다.

책 소개
『83과 4분의 1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 핸드릭 흐룬 지음. 최민우 옮김. 2018.11.16. (주)문학수첩. 474쪽. 13,000원.
헨드릭 흐룬 HENDRIK GROEN.
시사문예지 『어뢰』의 문학 사이트에 일기를 올리며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연재할수록 관심이 증폭되고 커다란 선풍을 일으킨 『83과 4분의 1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를 두고 “거짓말은 한 문장도 안 보탰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가 진실인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소설은 전 세계 36개국에서 출판 판권이 계약되었다.
최민우. 소설가, 번역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