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虛數)
첫 번째 이야기는 재미있게 잘 보셨나요? 쉬운 x인 '여자'의 이야기.
그녀의 괴로움은 전부 '기억을 하고 있는' 그녀의 탓일까요? 그녀가 붙잡고 확인하고픈 사람들에게는 '없는 일'인데 말이죠.
아니면, 그녀의 기억이 왜곡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모든 게 어린 그녀의 상상이 만들고 성장한 그녀가 각색한 허상일지도요.
허상.. 허상이라. 아, 그렇지!
연관된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만물은 수로 되어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널리 미움받는) 피타고라스가 한 말이다.
우주의 모든 질서와 조화가 수학적으로 정리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담하고 로맨틱한 발상인가.
정수, 소수, 분수같이 양의 직관적 가늠이 가능한 유리수. 대충 어디 존재하는지는 알겠는데 딱 정확히 한 점을 찍기는 어려운 무리수. 이 둘을 합쳐 우리는 '실수(real number)'라고 부른다. '실제로 존재하는 수'인 셈이다.
그런데 실수에 속하지 않는 수가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수, 그러나 이론적으로 필요한 수, '허수(imaginary number; i)'이다.
부모를 향한 어린 자식의 절대적인 사랑.
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이자, 생존을 위한 똑똑한 전략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매우 큰 비극이기도 하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에서는 결속력을 더욱 튼튼히 하는 본드로 작용하지만,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는
'존재만으로 한 인간을,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인간을 불행의 늪에 빠뜨린 죄인'이라는 굴레를 아이가 스스로 짊어지게 만든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찾는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의미를.
가슴에 난 구멍, 그 안에는 무한의 허무가 있다.
어서 긍정적인 무언가로 메꾸지 못하면, 마음은 결국 블랙홀이 되어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삼켜진 아이는 영원한 강박 속에, 멈추어진 시간 속에 모호한 존재로 남는다.
그는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존재해야 되는 거였을까, 존재했어야 하는 거였을까, 존재해도 되는 거였을까...
아이를 대신할 무언가가 그의 공석을 채운다.
상상의 자신(imaginary self)이 진짜 자신(real self)의 자리를 차지한다.
"너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자기 방어 시스템이 자아를 분열시킨다.
진짜 자신은 '너(객체)'가 되고, 상상의 자신이 '내(주체)'가 된다.
진짜 자신, '나'는 상상의 자신, '그'를 이길 힘이 없다.
모든 정당성과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으니까.
"너 같은 건 죽어야 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찌른다.
거부할 수가 없다. 피할 수도 없다.
"으윽..."
실질적 감각, 자해의 고통만이 그를 멈출 수 있다.
상징적으로라도 죽음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야 그는 나를 놔준다.
비록 잠시뿐이지만.
나는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죽음으로 향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도 아니다.
살기 위한 죽음과 죽기 위한 삶. 나에게 삶과 죽음은 혼재해 있다.
일직선(real world) 위의 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
복소평면(complex plane; 실수축과 허수축으로 구성된 평면) 위로 한없이 늘어져 있는 나의 본모습이.
"하하.. 하하하하. 아..."
그가 또 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