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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경미 Mar 11. 2022

타인의 '시선'에서
사라질 수 있는 자유

에세이_[자아 표류기] 돈 많은 백수가 된 사연

미지근한 바람 사이로 생생한 숨결이 일렁이는 시기. 신분을 철저히 숨겨야 할 것처럼 꽁꽁 싸맸던 사람들이 마치 마법에 걸린 듯 하나둘 자신을 드러내는 시기. 3월이다.

남들보다 추위를 예리하게 느끼는 감각 덕에, 더 정확히 말하면 질환 탓에, 나에게 겨울은 여간 힘든 계절이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온기를 지켜주고 있는 무거운 극세사 이불, 비싼 옷을 일시불로 살 수 있다는 므흣함을 숨기고 우아하게 카드를 내밀어 계산했던 다크 올리브그린 패딩(기대와 달리 두꺼운 김밥 같다는 혹평을 듣긴 했지만)과 고장 난 호르몬을 인위적으로라도 조절해준다고 믿으며 벌써 여러 해 복용하고 있는 신지로이드가 이 겨울이 어서 지나가기를 나와 함께 바라고 있었다.

지난해는 운이 좋게도 이 계절을 어떻게 보낼지 선택권이 주어졌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이뤄놓은 모든 것을 걸고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래야 함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잃는 가혹함 대신 당장 필요한 ‘이것’을 얻게 될 터였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사라질 수 있는 자유.’

그렇게 백수가 되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돈 많은 백수. 그해 겨울. 나는 고통스러운 타인의 시선에서 충분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괘씸한 눈발 하나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닫힌 문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시선을 고집스럽게 걸어 잠갔다.


타인을 ‘이해한다’라는 착각은 재앙의 시작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순수한 바람 때문에 타인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음을 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낯선 이의 호의와 미소에 따스함을 느꼈고, 성공, 성취, 인정, 친절, 미소를 가진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세상은 친절한 곳인 것 같지만 악인은 늘 있었고, 그 혐오스러운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나’였음을 깨닫게 되면서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 천천히 파괴되어감을 느꼈다. 미움받지 않고 사랑만을 갈구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부른다는 진리를 깨우칠 지혜가 나에게 없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나라고 믿었던 모습은 더 이상 ‘나’가 아니었다. 그 허상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을 때 창밖의 세상은 모순과 모순으로 엉켜있는 곳, 악의적 상처를 주고받는 통제 불가한 곳, 그래서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이다지도 끔찍한 곳에 꼭 살아야 할 만한 이유라는 게 있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나의 부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신과, 최면술, 명상, 현자들의 지혜를 담은 책 등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노력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적어도 세상의 모서리에서라도 타인과 부대끼며 살고 싶은 욕심에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다 포기하고, 찾다 포기하는 과정이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결국 지금 나는 백수다.


3월. 흥미로운 무엇이 나타날 것만 같은 시기. 순수한 정열이 서투르게라도 고개를 내미는 계절. 누군가를 사랑함과 동시에 나를 지키며 살아갈 용기, 인정과 존경, 환대를 갈구하지 않고 삶의 본질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성숙함, 그리고 존재의 공허함을 감사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겸손함이 조용하게 싹 틔워주길……. 그래서 마침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에 스며들 수 있는 날이 오길…….

나 없이도 북적이는 도시의 밤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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