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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경미 Mar 25. 2022

14살. 앙큼한 그녀의 로맨스가 기대되는 이유

에세이_달콤 세콤 체리향 판타지

두-둥.

대학교 합격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랬을까. 점심 이후 나는 오매불망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을까. 생각보다 늦어지는 전화에 그녀가 혹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나던 그때, 드디어 반가운 벨 소리가 들렸다.

“나, 망했어.”

“아,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아쉬운 마음도 잠시, 나는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며 전화기 저편 목소리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혹시 우는 건 아닌지, 마음이 산란한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실망이 컸을 텐데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는 귀여운 억울함이 느껴지는 정도였다. 그럼 됐다. 안심이다. 

나에겐 에너지 넘치는 왕 수다쟁이 딸이 있다. 밤새 우는 갓난아기를 보며 ‘이렇게 10년을 키워도 열 살밖에 안 되네.’ 생각하며 한숨 쉬었던 게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열네 살이 되었다. 요즘 우리 딸은 연애에 꽂혀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바투 연준에 빠져 포토카드 모으기에 전념했던 그 아이는, 잡히지 않는 사랑 대신 달달한 순정만화 같은 일이 ‘찐’으로 벌어지길 소망하고 있었다. 그 대장정의 시작이 오늘 발표에서 결정될 참이었으니 오늘은 바로 중학교 배정 통지서를 받는 날이다. 그녀가 꿈꾸는 로망을 이루기 위해서 남녀공학 입학은 필수였기에 오늘은 그녀 인생에서 몇 없는 매우 중차대한 날임이 틀림없었다.

“나, 이제 남자 친구 못 사귀어?” 

절망에 가까운 귀여운 외침은 눈치 없이 나를 웃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여중에 입학하게 되었다. 남사친, 여사친들과 눈부시게 빛나는 그들만의 성장드라마를 찍고 싶었을 딸에게는 잔혹한 일이지만, 그녀의 순진무구한 걱정 때문에 나는 오랜만에 깔깔대고 웃었다. 아이는 자신도 우스운지 넓어진 코 평수를 줄여가며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했다. 엄마는 전화 너머에서도 아이의 표정이 보인다.

“엄마, 공주 지금 심각해!”

“그럼 미팅하면 되지.”

“중학생이 무슨 미팅이야.” 

딸은 옷 갈아입고 오라는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자마자 내가 앉아있는 소파에 쓰러질 듯 몸을 맡기더니 통화로는 다 전하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다.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어느 중학교에 누가 되었는지, 그들만의 에피소드는 뭐가 있는지, 하나도 빼먹지 않고 얘기하는 딸을 보며 ‘어떻게 엄마가 제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다고 생각할까?’의아해할 때 즈음, 이야기의 주제는 학교 선배들은 어떤지, 어떤 동아리에 가입할지로 바뀌어있었다. 앵앵거리다 까르르 웃다, 변덕스러운 하이톤 목소리가 또로롱 떨어지는 영롱한 물소리 같다.

“그런데 학교 옆에 남고가 있다더라?” 

마지막 희망의 불씨는 기분 좋게 살려놓는 우리 딸을 가만히 보며 ‘사랑받을 때의 매혹적인 기분을 알 나이가 되어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 남자 친구랑 손도 잡고 싶단 말이야.”

아직은 어린 탓에 숨김없이 고백하는 그녀의 솔직한 로망을 듣고 있자면 딸에게 상큼하고 달콤한 체리 향이 나는 것 같다. 나도 딸처럼 달콤한 향이 나던 때가 있었다. 까마득한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야 맡을 수 있는 달달함이지만 오늘만은 애잔하니 나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1991년. 난 참 예뻤다. 자기 입으로 말하면 거부감을 주는 탓에 이쁨이 반감된다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어린 시절의 나는 꽤 이뻤다.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쟤 예쁘다.”라고 말하기 일쑤고, 걸어가는 나를 멈추게 하고서 내 홍채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 “너는 눈이 참 예쁘게 생겼구나.” 얘기해 주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모르는 아이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던 시절이었다. 어설픈 어리보기에게도 신은 세상을 살 무기 하나쯤은 주셨다. 

향긋한 아름다움이 충만했던 열네 살 어느 날. 마른날에 날벼락이라는 게 이런 건지 모르겠다. 쉬는 시간에 난데없이 오락부장 윤선이가 내 손을 부여잡고 무작정 복도 끝으로 끌고 갔다. 소위 잘 나가는 윤선이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달리기는 물론 모든 운동을 잘하는 아이였다. 머리카락 귀밑 3센티라는 저주가 모든 학생을 영심이같이 보이게 했지만, 윤선이의 매력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 같았다. 뭐든 이겨야 하는 성격 때문에 운동회 때 우리 반이 지기라도 하면 분한 마음에 운동장 모랫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리는 다소 황당한 모습은 3년 내내 전 학년 선생님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런 윤선이가 마음잡고 135센티의 깡마른 나를 끌고 가니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마네킹처럼 끌려가길 몇 분. 나는 복도를 지나 계단 끝, 빛이 잘 드는 창가 옆 어느 남학생 앞에 내동댕이치듯 세워졌다. 남학생은 무대에 올라간 어느 연극배우를 흉내 내듯이 과장된 멋을 잔뜩 부린 체(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러든 말든 수치심 만랩인 나는 다시 교실로 가려고 뒤돌아섰지만, 윤선이는 무슨 심산 때문인지 나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그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워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산만하게 엉킨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윤선이의 승이었다. 내가 포기했음을 안 윤선이는 그제야 나를 놓아주고 몇 계단 올라가 앉더니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와 그 남학생을 바라봤다. 아니, 윤선이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이 작은 소동에 구경꾼으로 참석했다. 창피한 마음과 이왕이면 앞에 있는 남자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상반된 감정이 어렵사리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약간은 겸연쩍어 보이는 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내 그 남학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윤선이가 여자 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감성 충만 로맨스 판타지 BGM이 흘러나와야 하는 순간이다. 그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제야 이게 무슨 일인지 감이 왔다. 윤선이와 나는 태생적으로 극과 극이라 대화도 몇 번 안 해봤는데, 왜 나를 찜했을까. 짧은 순간 ‘내가 예뻐서?’라는 생각까지 머물게 되었다(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얼버무리다가 그 아이를 조심히 눈에 담아봤다. 윤선이가 소개해줬으면 이 아이도 분명 날라리일 텐데, 그와는 달리 지적인 분위기가 났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오늘의 만남을 위해 준비했는지 그의 교복은 말끔히 다려져 있었다. 만화 호머 심슨의 와이프, 파란 머리 ‘마지’ 같은 높은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그는 선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비록 나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분명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성이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경험이 처음이라 요란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억지로, 아니 극적으로 난생처음 첫 남자 친구가 생겼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을 20세기. 14살 아이가 이성친구가 있다는 것은 노는 아이라는 낙인을 찍기에 딱 좋은 빌미를 주었다. 나 같은 애가 불량학생이 되다니.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일 이후, 내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 아이는 수업 종이 칠 때마다 용기 내어 우리 반 복도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체육이 있는 날이면 시간에 쫓기듯 뛰어와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야성미를 보여주기도 했고, 더러는 부끄러운지 친구 여럿과 함께 오기도 했다. 그런 그의 애정 행각에 반 친구들은 쉬는 시간마다 “종 쳐라!”를 외쳤다. 그 별명은 정말 찰떡이었는데, 수업 종이 땡, 치면 언제 왔는지 뒷문 직사각형 유리 너머로 빠끔히 보여서도 그랬고, 그 아이 이름이 ‘종철이’이기도 해서 그랬다. 

박종철. 내 첫 남자 친구. 나는 친구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즐기며 종종걸음으로 나가서는 쉬는 시간 10분을 그와 복도에서 보내곤 했다. “운동하고 왔어.” 한마디 하고 몇 분을 말이 없고, “그랬구나.” 대답하고 또 몇 분을 말이 없었다. 그렇게 10분은 속절없이 지나가지만, 그 시절은 알 수 없는 언어가 저절로 읽히는 마법이 깃들어있는 시기 아니던가. 우리는 많은 말을 하는 대신 둘에게만 들리는 로맨틱한 음악의 선율에 시간을 맡겼다. 꽤 다정한 사이였다. 보면 볼수록 사려 깊은 성품을 지닌 아이가 나에게 반한 것 같은 기분이란.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자면 내 몸 이곳저곳이 간지럽게 느껴져 박박 긁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가끔은 방과 후 데이트를 했다. 떡볶이를 먹거나, 학교 수돗가 뒤편이나 동네 놀이터에 앉아서 어색하게 웃으며 비죽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 시절 소위 날라리라 불리던 친구들도 순수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은 공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았다. 런던 보이즈 최신곡이 실린 새 카세트테이프. 누가 나를 생각하며 선물을 고르다니. 나도 그럴 가치가 있구나……. 어린 마음에라도 사랑받는 기분은 참으로 포근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우연히 런던 보이즈 팝송을 듣게 되면 그 공터와 수줍게 내민 그 아이의 손이 떠오른다.

아쉽게도 손을 잡아본 기억은 없다. 있었다면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지. 비현실적이었던 신비로운 경험은 언제 사그라들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윤선이의 오지랖이 나비효과가 되어 내 인생에 다시 올 수 없는 순수한 설렘을 가져다준 건 분명한 것 같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나의 로맨스를 들려주었더니 하나같이) 코웃음을 친다. ‘날 무시하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그렇게 솜사탕 같은 달달하고 수줍은 아이를 상상하긴 어렵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나를 실컷 놀리다가 “그래도 엄마 젊었을 땐 예뻤어.”라고 달래주는, 나보다 3개월 어린, 그래서 나이에 ‘빠른’을 달고 사는 배 나온 남편도 중학교 졸업앨범에서는 그렇게 반듯한 소년이 아닐 수가 없다. 시어머니가 익히 말해준 그의 열네 살 로맨스도 나 못지않게 달달했다. 그도 그만의 소년다운 순수한 로맨스가 있었겠지. 그때 그는 어떤 향이 났을까. 우리 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 조명이 있는 화장대 앞에 앉아있다. 딸이 그 앞에 있는 시간은 꽤 길다. 힐긋힐긋 조명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가장 예쁜 표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가끔은 나를 3초간 바라보는데 나는 딸이 무엇을 바라고 나를 쳐다보는지 알고 있다. ‘예쁘다고 말해줘!’ 아이는 눈으로도 자막을 쓸 수 있고, 엄마는 보이지 않는 자막을 읽을 수 있다. 그러면 난 우연히 보고 생각난 척 “우리 딸 예쁘네.”라고 말해준다. 예쁘지 않아도 예쁘고 예뻐도 예쁘다. 우리 딸은 그때의 나보다 더 반짝인다.

“엄마, 민석이가 날 좋아한대.”

사랑에 대한 강한 욕구가 마법처럼 솟구치는 시기 열네 살. 무해한 그녀의 공상이 사랑스럽다. 설레는 로망으로 가득 찬 이 아이는 언젠가 청룡열차 타듯 오락가락한 사랑의 기분을 만끽하겠지. 엄마가 몰라야 할 비밀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건 서운할 일이지만 나도 딸만큼이나 앙큼한 그녀의 로맨스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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