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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경미 May 19. 2022

시어머니가 될 뻔한 당신에게

어느 방울뱀의 기도

참 경쾌한 계절이었습니다. 가슴에 러플 장식이 달린 연노란색 블라우스와 햇빛에 살짝 빛나는 검정 스커트가 떠오르는 걸 보면 아마도 늦봄이나 초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은 키를 가려줄 구 센티미터의 검정 에나멜 구두를 신고 상가 유리창에 비치는 제 모습을 일일이 확인하느라 발걸음이 늦어졌습니다.

‘오늘만 지나면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 내 좋은 점을 알아봐 주실까.’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하다 길을 잃고 낯선 골목길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나를 부정하는 당신을 마주 봐야 했던 그날. 걸으면 걸을수록 하늘빛이 변해가고 제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당신의 아드님과 저는 지인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그는 첫눈에 저에게 반했죠. 저를 위해 고기를 썰어주고, 와인을 마시다 말고 흥겹게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없는 자유로움이, 인생을 대하는 자신감이 그를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삶의 에너지는 제 것도 흡수하여 극대화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행복이었어요. 그렇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신의 아드님과 저는 로맨틱 소설에 나올법한 아름다운 서사를 매일 써 내려갔습니다. 서로에 대한 찬사는 마를 날이 없고 바라보는 눈길은 부드러웠습니다. 우리는 미친 것 같다고 말하며 까르르 웃었습니다. 사랑의 감미로움은 저를 숨 쉬게 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너를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야.

네가 얼마나 좋은 아이인지 보면 아실 거야.     


거대한 손아귀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제 왜소한 키가, 학력이,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그와 결혼할 수 없는 사유가 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단식하다 결국 병원에 실려 가신 게 이때쯤이었나요. 그 이후였나요. 저를 만나보지도 않고 비난부터 퍼붓는 당신을 미워하는 대신 빨리 당신을 만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그날이 되었습니다. 

드르륵.

적지 않은 풍채. 갈색 파마머리에 얼굴이 꽤 크고 동그란 한 중년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눈 속에 타닥거리는 불꽃을 애써 숨기지 않고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셨죠. 그때 당신의 얼굴은 흡사 고약한 방울뱀 같았습니다(지금 생각해봐도 똑 닮았습니다).

인사를 위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저를 보며 키, 몸무게, 그리고 체형까지 한눈에 파악하고 ‘역시’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으셨죠. 그런 당신에게 큰돈을 들여 구입한 시즌 신상품 한 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습니다.

치르르- 치르르-

방울뱀이 제 주위를 도사리며 꼬리 끝에 있는 방울을 흔들어댔습니다. 먹이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본적은 어디시니.

천안입니다.

어머니 본적은 어디시니.

…….     

(저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한 번도 어머니 고향 같은 게 궁금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큰 잘못이구나.’ 처음으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사촌들은 뭘 하시니.

가족 중에 의사와 변호사는 몇 분이나 계시니.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은 그 후에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교는 어디 졸업했니.

강원대학교 졸업했습니다.

공부를 못했나 보구나.

…….     


저는 찢어진 인형 취급을 받으며 이리저리 굴러다녔습니다. 아드님을 통한 세밀한 사전조사는 ‘너의 주제를 알라’는 심사기준에 가져다 쓰였습니다. 면접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끝까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고차원적인 질문을 할 능력이 없으셨겠죠. 당신의 아드님도 중산층과 결혼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질문으로 생각하는지 그 생생한 약육강식 현장을 보고만 있었죠. 외로웠습니다.

방울 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상당히 오래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드라마 소품이 된 회를 몇 점 드신 후에 마무리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오늘 경미라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우리 경미도 좋은 사람 만나서 하나님의 은총 아래 행복하게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당신의 현란한 기도를 다 기억하진 못합니다. 제 살갗에 돋은 상처 위로 살충제를 마구 뿌린 대목만 기억날 뿐입니다. 당신은 기도라는 이름으로 저를 어두운 지옥 한복판으로 다정히 데리고 갔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이 아멘을 함께 소리 내어 말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은 얼마나 잘났는데?

친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그를 잡고 있는 이유를 궁금해했죠. 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은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부모를 존경하고 남동생을 무척이나 아꼈습니다. 저렇게 끈끈한 가족애가 있는 사람과 결혼한다면 나도 그런 가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을 그런 가정에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가족 안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마침내 나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 당신의 아드님은 간혹 몇 시간씩 연락이 안 됐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서 위험한 곡예를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혹시 선봐?

…….

저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헤어지지 않으면서, 틈날 때마다 당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그의 생존 전략이었을 테니까요. 나쁜 시어머니 역에 몰두하기로 작정한 당신이 ‘손주가 키가 작으면 어떡하냐. 손주가 공부 못하면 어떡하냐’를 연발하며 저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찢고 액자를 깨뜨리는 악랄함을 바로 옆에서 견디고 있던 당신의 아드님이 저는 그저 고마웠습니다.     


당장 우리가 사준 아파트에서 나가고, 차를 가져와. 원하는 대로 결혼해 봐. 앞으로 그 어떤 것도 바라지 마.     

마지막으로 필사의 각오로 던진 당신의 공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절망의 끝에서야 당신은 정확히 아드님의 약점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지쳤습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아드님은 울었습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저는 그가 아직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우리 이렇게라도 계속 연락하면 안 될까?

선은 계속 보면서?

…….


당신의 아드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끈적거리는 이기심은 당신을 닮은 걸까요.

그것이 우리의 진짜 마지막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당신의 기도는 확실히 응답받았습니다.

당신의 요란한 입으로 쓰레기통에 처넣어진 저는 당신이 간절히 기도한 덕에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이 졸업한 외대 졸업생들이 저희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오고 그들은 저를 대표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의 아드님은 아직 대기업에 다니고 있나요. 회사 다닐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면 제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 이력서를 내보라고 해보시죠. 잘 검토해 보겠습니다. 어머니의 부동산과 주식이 또 그사이 얼마나 올랐는지는 모르지만 저 또한 이제는 물건 살 때 영수증을 보지 않아도 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저를 참 유치하게 만드십니다).

십오 년 동안 한 번도 다툰 적 없는 며느리와의 관계를 항상 자랑하시는 시어머니는 저의 본질을 사랑해주셨고, 키 작은 사람이 더 올망졸망 일을 잘한다며 예뻐해 주시는 시아버지는 부족한 부분을 가볍게 털어주셨습니다. 이분들을 만난 건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대단하지 않은 당신의 오만함과 사람을 향한 비틀린 태도는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용서하려 합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당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우월감이 아닌 열등감의 표출이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을 테죠. 우리는 그저 인간이기에 성숙하지 못한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무결점의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도 나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방울뱀은 자신의 방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당신도 아마 당신의 아둔함을 평생 모르고 살아가겠죠.

이 편지를 읽으셔도 끝내 알지 못할 겁니다. 속이 부글부글하시죠. 그렇다면 그때처럼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겠어요. 당신의 기도는 이루어지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고약한 방울뱀 님.

시어머니가 될 뻔한 당신에게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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