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EN VILLAGE May 25. 2022

플라스틱 줄이기가 최선은 아니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각종 공중파 정보 프로그램에선 매일 육류와 생선을 소재로 요리, 맛집, 대박이 난 비결, 감동적인 사연이 소개되고 있다. 케이블 채널과 늘어난 개인 플랫폼에서는 더 왕성하다. 내가 사는 지역엔 송어’축제’가 열린다. 화천의 산천어 ‘축제’도 아주 유명한 축제 중 하나다. 맛을 위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끌어와 먹는 게 흐름이 됐고, 어느새 인간의 행복을 위해 ‘고기’는 대체 불가능한 자리를 꿰찬 듯하다.


 그런 흐름과 더불어 성장하고 있는 물결은 채식이다. 건강, 동물, 환경 등 여러 이유로 채식하는 이들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고기 산업’이 모든 영역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나타내고 있다. 채식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이때 고기는 주로 닭, 돼지, 소, 오리 등의 육지에서 사는, 시뻘건 고깃덩어리라는 인식이 강할 것이다.


 채식의 단계에서도 이들을 섭취하는 걸 금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고, 그 뒤로 해산물을 금하는 단계가 이어진다. 문득 그 기준에 의문이 든다. 왠지 해산물은 육류보다는 덜 자극적이고 덜 시급해 보여서, 그 중요도가 덜 해 보이기 때문일까? 바다는 무의식 중에 비교적 안전지대라고 인식되는 듯하다. 무한할 것 같고 생명의 이미지가 가득하니 말이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어업이 이어진다면 2048년에 바다는 사실상 텅 빌 것이란 분석이 있다는 걸 아는가? 불과 20년 뒤에 생선이란 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생선이 사라진다는 건 바다가 죽는 것이고, 그건 육지와 하늘과 인간이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 바다와 바다에 사는 생물은 육지에 사는 생물과 동등하게 중요한 개체고, 핵심적인 환경 유지 요소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면, 혹은 외면하고 싶다고 할지라도 넷플릭스의 <씨스피라시>를 꼭 보시길 바란다. 환경과 관련한 다큐멘터리, 책을 어느 정도 본 입장에서 단 하나만 추천해야 한다면 바로 이 영상을 고르고 싶다. 해양을 넘어 땅, 하늘, 인간 전부를 아우르는 파괴의 굴레와 공존의 메시지를 역설하며, 자연은 너무나 당연한 원리로 상상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래 내용은 공허한 주장이 아니라 실제 영상 속 근거를 바탕으로 한 사실이다.



 고래, 참치, 상어, 모든 물고기가 죽임당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고래가 해안으로 밀려오고, 플라스틱이 배 속에 가득하다. 고래는 왜 죽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고래는 숨을 쉬러 해수면으로 올라올 때 초소형 해양 식물에 비료를 주는데, 그 혜택을 보는 플랑크톤들은 아마존보다 4배에 달하는 이산화탄소를 흡수, 우리가 마시는 산소의 85%를 생산한다.


 이런 생명의 원천 고래가 플라스틱을 먹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연히 압도적인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이다. 1분마다 트럭 한 대 분량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에 버려지고, 그들은 미세플라스틱으로 분리되는데 그 수가 은하계 별보다 최소 500배가 많다. 이미 태평양에는 1억 5천만 톤의 거대 쓰레기 섬이 있다. 이를 보고 플라스틱을 줄이기만 하면 고래를, 다른 생명을, 바다를 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만 그 이면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먼저 직접적인 학살이다. 일본의 ‘다이지’에선 매년 7백 마리가 넘는 고래가 학살당한다. 이를 감추기 위해 경찰이 동원되고 체포와 구금도 이뤄진다고 한다. 영상 속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살아있는 돌고래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조련된 돌고래는 10만 달러(한화 약 1억 2천만 원 상당)를 호가한다. 그들은 인간의 먹거리와 볼거리로 소비된다. 고기를 먹고 동물원, 동물 쇼를 보는 것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사냥을 허락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일본은 하나의 작은 예시에 불과하다. 페로 제도(영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포경은 하나의 축제이자 전통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고, 죽임 당하는 돌고래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연히 돌고래만이 희색되는 종은 아닐 것이다. 모든 어종에게 해당하는데, 그중 대규모 참치 산업이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비싼 참치 종인 참다랑어는 오직 3%만이 남아 있다. 그 뒤엔 샥스핀을 위한 상어 사냥도 자리 잡고 있다. 상어는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미디어에서 소비되는데, 사실 상어는 매년 10명 정도의 사람을 죽이고, 사람은 시간당 1~3만 마리의 상어를 죽인다. 참담한 건 이들 중 절반은 부수 어획이라는 것이다. 부수 어획이란 어업의 본 목적이 아닌 종이 같이 잡혀 얻게 된 것을 뜻한다. 이들은 부수적인 수입이 아닌 ‘쓸모’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죽임 당한 채 바다에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종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돌고래 안전 마크를 달고 있는 참치 캔도 부수 어획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부수 어획에서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종을 막겠다는 생명 인증 마크를 뜻하는데, 그 체계는 이들을 위할 만큼 정교하지 않으며 자본에 쉽게 매수된다. 오히려 인증하는 행위 자체로 수입 대부분을 거둬들이고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지속 가능한 어업이란 개념도 성립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환경과 어업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제도인데, 그를 위해 정부가 옵서버(감시자)를 파견한다. 그러나 드넓은 바다에선 무엇이든 숨길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옵서버 수십 명이 실종되었거나 살해되었다. 돈을 위한 어업을 지속하기 위해 장기매매, 인신매매를 자행하는 조직이 연루되기도 하고,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극히 인권 침해적인 노예를 만들어 노동력을 착취한다.


 결국 비인간 동물(이슬아 작가의 표현을 빌림)을 위한 인증은 허구다. 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인간 동물을 위한 표식일 뿐이다. 이 세상은 돈을 위해선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우리가 먹고 즐기는 과정 뒤엔 산업이라 부르기에도 힘든 폭력적인 관습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바다 속 플라스틱의 절반은 어망이다


 어업의 폭력적인 구조는 가히 압도적이라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여전히 플라스틱을 줄이는 것이 개인의 적극적인 노력이 아니겠냐는 반문을 할 수 있다.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 함정이 더 남아있다.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 중 절반이 어망이라는 것이다. 어망은 자체로도 해양에 위협적이지만,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발명된 기구인 만큼 쓰레기가 되어서도 살아있는 해양 생물을 붙잡아 죽여 같은 쓰레기로 전염시킨다.



 바다에 유입되는 전체 플라스틱의 0.03%만이 플라스틱 빨대다. 실제 플라스틱으로 죽는 바다거북은 연간 천 마리 정도다. 그러나 미국 한 곳에서만도 어업으로 죽거나 다치는 바다거북은 25만 마리다. 중요도와 영향력을 따졌을 때 당연히 어업 중단을 역설하는 게 플라스틱을 줄이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은 플라스틱을 줄이라는 단체와 문구다. 그 이유는 역시 자본이다. 그들을 후원하는 회사가 어업과 깊게 관련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그나마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을 줄이는 것, 물론 의미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 구조 아래에선 그것만으로 환경을 위하고 있다고 자위하기엔 한참 부족한 것이 잔인한 사실이다.



 자연은 무서울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돌고래의 기능과 더불어 상어 역시 바다의 환경을 지키는 데 크게 일조한다. 아니 사실 모든 생명이 바다를 지키는 데 빠짐없이 필요하다. 심지어 평범한 물고기 떼가 이동하면서 일으키는 물의 흐름마저도 대기 열을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의 특수한 기능과 순환하는 먹이 사슬은 자체로 해양의 환경이다.


 그런 환경을 명시적으로 파괴하는 어업을 지속하는 건, 바다와 땅과 하늘을 파괴하는 동시에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재 세상은 어떠한 영역도 예외 없이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게끔 설계되었다. 법과 제도로서 저항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먹고 보는 데서 즐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산업의 굳은 관행은 박차를 가해 달려갈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억울해도 변함이 없다. 이미 사회는 그렇게 굳어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소비하는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채식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다른 걸 떠나서 생명을 소비하는 것에 의문을 한 번 갖기를 바란다. 생선도 생명이다. 너무 당연하다. 신경계가 있어 고통을 느끼고, 기억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인지하고, 의사소통 하고,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 사람을 낚아채는 갈고리가 입을 찢는다고 생각해보자. 사람을 한 곳에 몰아서 그물로 잡아들인다고. 태어날 때부터 온갖 약품을 동원해 좁은 곳에서 살아가게 한 다음 죽인다고. 그게 사람의 당연한 운명이라고. 그것에 기이함을 느낄 수 있다면 사람 대신 어떤 생명체를 대입도 기이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이든 생선이든 벌이든 닭이든 송충이든 다 하나의 개체, 하나의 생명이다. 무엇 하나 다르지 않다. 혹자는 인간은 고도의 지능을 가졌다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인간은 다르다. 지능이 높기 때문에 모든 육류 없이도 인간이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는 영양학 연구를 수행했고, 다양한 채식 조리법과 더불어 각종 고기, 달걀, 해산물 등을 재현하는 대체육 산업을 개설하고 발달하고 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지능이 높은 증거이자 결과다. 높은 지능을 나와 타인을 위해 적절히 사용해보자. 남은 시간이 정말 없을지 모른다.








Reference

넷플릭스, <씨스피라시>








Editor & Contents Director : 정 해영

About Writer : blog.naver.com/zmzmtk8













작가의 이전글 타투에도 비건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