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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Aug 16. 2024

#1. 내 머릿 속에 산책

산책의 본질은 사색이다.


# 산책은 나를 만나는 과정이다.




프롤로그


왼발을 오른발 앞에 놓는다.

그다음 오른발을 왼발 앞에 놓는다.

필요하다면 이런 동작을 반복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걸음이라고 부른다.

걸음은 이동의 필수 조건이다.

음...아니다. 이 문장은 과거형으로 써야 할 것 같다.

오늘날에는 이동을 위해 걷는다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길이 이어진 곳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지하철을 타고 어두운 땅속을 아찔한 속도로 빠르게 여행할 수 있다.

더 빠른 기차나 그보다도 빠른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가 600만 년 전 직립보행을 선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걷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으며,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걸어야 했다.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걷는다는 것은 곧 생존이었다.

요즘은 걸을 일이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나 회사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거나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넷플릭스 드라마를 몰아보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무빙워크, 전동킥보드,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동 수단들에 몸을 맡기고 스마트폰에 빨려 들어갈 듯 시선을 묶어둔다.

어쩌면 먼 미래에 우리 인간은 걷는 법을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걸음이 없다면 산책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걸음이 곧 산책은 아니다.


걸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시에 무척 많은 것들을 해낸다.

걸을 때 신체에는 상당히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주변의 풍경을 인식하는 동시에 노면의 상태를 파악하고, 스치는 사람들을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근육들이 유기적으로 협조하며 균형 잡힌 움직임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걸음마를 배운 이후로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 기적에 가까운 걷기를 새털처럼 가볍게 생각해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보행 로봇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걷지 못하는 것을 보면

걷는다는 행위는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행동을 놀랍게도 무의식적으로 해낸다.

나는 가끔 걷다가 그런 사실에 깜짝 놀란다.


산책과 사색은 잘 어울린다. 산책을 육체적인 운동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산책이다.

산책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아우른다. 정신적인 측면만 강조된다면 산책은 정신 노동이 된다.

걸으며 복잡하고 우울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거나 과학적 논리 사고에 빠진다면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노동이며 고통이 된다. 산책은 어떤 의미에서 유희이며, 진지해서는 안되는 놀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산책은 사색을 위한 최상의 환경을 제공한다.

걷는 동안 우리 두뇌는 시각적 정보 처리의 결과를 온몸의 신경과 근육에 전달하느라 뇌의 다른 영역을 쓰기가 어렵다. 오직 사색과 상상, 그리고 청각과 촉각과 후각으로 전해 오는 주변 정보들을 읽어내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걸으며 책을 읽는다거나, 산수가 아닌 수학같은 복잡한 셈을하거나 온전히 음식을 먹으며 미각에 집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마찬가지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스마트 폰을 보는 것, 또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두가지 행위를 동시에 하기도 상당히 어렵다.

심지어 물을 마시기 위해서 때로는 걸음을 멈춰야만 한다.

산책을 하는 동안 우리의 뇌는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산책과 궁합이 잘맞는 것은 오로지 사색뿐일지도 모른다.


산책은 모태 속의 양수처럼 작고 익숙한 동네 풍경에서 편안함을 호흡한다.

그런 느낌들은 나를 자의식이 생기기 전의 행복했던 시절로 이끈다.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산책하며 사색하는 것을 좋아한다.

산책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등산도 걷기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지만 산책은 등산과 다르게 화려한 배낭이나 튼튼한 등산화, 기능성 등산복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또 마음먹고 특정한 날을 고르거나 정복할 산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험한 산을 오르며 오로지 사색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산책은 그저 편안한 신발 하나와 아침 또는 저녁에 30분에서 한 시간의 시간을 투자할 여유있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산책은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걷는 동작이 아니다.

좋은 의미의 산책은 어디로 계속 이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는 것이다.

때로는 코끼리처럼 느릿느릿 걷다가도 원숭이 처럼 부지런한 발놀림으로 속도를 높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어느 멋진 풍경이나 노을 앞에서 멈춰 서기도 한다.

스치는 풍경에 감동하고 호흡하는 공기 속에 촉촉한 느낌과 향취를 느끼고

눈부신 햇살이나 가볍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산책 중에 굵은 빗방울을 만나면 어느 가게 처마 밑으로 돌진햐야 할때도 있다.

이런 경우를 나는 산책의 변주곡이라고 부른다.

나는 가끔 산책 중에 만나는 예상하지 못한 소나기가 좋다.

비가 닿지 않는 처마 밑에서 무섭게 쏟아지는 열대성 스콜을 응시하고 있으면 왠지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울려퍼지는 감미로운 음악들을 들으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는 것이 좋다. 베트남의 스콜은 보통 30분 이내에 멈추기 때문에 곧 그칠 비를 바라보는 것이 아쉬울 때도 있다.


나는 산책 속에서 나 자신을 찾아가는 사색과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걷는다.

물론 매번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돌아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걷는다.

정신이 자유롭게 헤매도록 집중해서 한걸은 한걸음 다리를 움직인다.

나는 리듬을 찾고 주위를 느낀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기도 하고 어디선가 쓰레기를 태우는 타는 냄새에 집중하기도 한다.

다리가 살짝 뻐근하고 두발이 시큰해지는 느낌이 좋다.

아프지만 기분이 좋다.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어떤 기대감도 사라지고 미래애 대한 불안감도 사라진다.

그렇다. 산책은 휴대 가능한 평온함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산책을 즐겼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를 걷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고,

니체는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고 확신하며 알프스 산맥으로의 산책을 즐겼다.

홉스는 느긋하게 걸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 잉크병을 넣을 수 있는 지팡이를 특별히 만들었다고 한다.

칸트는 알다시피 산책 마니아였다.

그는 매일 오후 쾨니히스베르크를 늘 똑같은 시간에 산책했다.

그의 산책 시간이 어찌나 한결같았는지 주민들은 그의 산책에 맞춰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나도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산책한다.

내가 위대한 철학자들처럼 깊이있는 사색을 즐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 산책의 대부분은 망각을 목적으로 한다.

짜증나는 상사와 어처구니없는 회사일, 아내와의 말다툼, 끊임없이 울리는 카톡 메시지와 이메일 알림, 신용카드 청구일과 내 통장의 잔고.

걷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들이 물담긴 컵 속에 떨어진 한방울의 잉크처럼 희석된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산책은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산책이 경보처럼 속도를 경쟁하는 것이라면 난 산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와 산책을 경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그건 마치 경쟁하는 명상만큼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또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산책의 과정은 평등하다.

지위가 높든 낮든 걷기라는 행동은 자신의 몸을 직접 사용해서 이동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키가 크거나 보폭이 넓다고 해서 유리한 것도 아니다.

산책은 빨리 어디론가 가야하는 경보 시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나는 대체로 경쟁에서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산책은 리베카 솔닛이 말했듯

'인류가 시작된 이래 전혀 진보하지 않은 몇 안 되는 활동'이라는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걷기는 가장 느린 이동 방식이지만,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다.


산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걷기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걷기의 효능이나 올바른 걸음 자세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물론 좋은 걸음 자세가 산책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걷기를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사색이 주요한 보상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수확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나 자신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며 스스로를 더 세밀하게 알아가게 된다.

오늘도 나는 산책을 나간다.

한 번에 한 걸음씩 단단한 대지를 꾹꾹 누를 때 대지가 나를 다시 밀어 올리는 그 감각이 좋다.

루소는 말했다.

"혼자서 두발로 산책할 때 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산책에 맞고 틀림이 없듯이 사색에도 맞고 틀림이 없을 거란 익숙하지 않은 확신으로 만나는 풍경에 한두가지 질문을 던지며 오늘도 타박타박 산책길을 걷는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보장하지 않지만 좋은 질문은 최소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금 생각하게한다.

좋은 질문은 마치 좋은 산책과도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과정에서의 경험과 느낌들을 더 중요한 순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 면에서 산책은 인생의 여정과 닮아 있다.

잔디와 함께하는 산책은 늘 질문으로 가득차있고 잔디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잔디와 함께 질문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산책길에 늘 함께 하는 산책 마니아 반려견 '잔디'


아름 : 잔디

나이 : 4세

성별 : 암컷

견종 : 포메라이언

특기 :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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