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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Aug 19. 2024

#2. 아침형 인간의 비애

'루소'의 자기 사랑


온전히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요일 아침 6시 30분.

영양제 몇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물과 함께 삼킨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는 '잔디'의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어 준다.

일요일 늦잠만큼 달콤한 행복이 인생에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나는 이미 잠에서 깬 지 40분이 지나 있었다. 나에겐 오래간만에 늦잠이다.

잔디도 아침형 개다. 내가 침대에서 뒤치적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산책을 가자고 꼬리를 흔든다. 잔디는 산책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사랑한다.

나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현실을 짊어지고 산다. 

그게 사랑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자신을 망가뜨리면서도 현실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신보다는 다른 것들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 같다.

잔디에게 목줄을 하고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현관문을 나선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길 위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처음부터 아침형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보다는 젊고 튼튼하던 시절엔 지독한 저녁형 인간이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보통은 새벽 1시에나 억지로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았다.

심야 영화관에서 밤을 하얗게 새우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출근할 때 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5분만 더"를 수차례 외치다가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시간에 막차를 타듯 침대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치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돌아보면 그렇다고 늦은 밤까지 생산적인 일을 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삶은 그런 잠의 패턴을 변화시킨다.

지금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나는 보통 새벽 4시 반이나 늦어도 5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여전히 달콤한 잠에서 깨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문득 잠에서 깨버리고 나면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다.

가끔  알람이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람을 깨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잠을 불필요하고 성가시며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시간으로 보는 시각이다.

우리는 보통 인생의 1/3을 잠으로 소비한다.

짧은 인생을 잠으로 낭비한다고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 한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잠을 인간의 순수한 쾌락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수면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깊은 잠에서 깰 때 느끼는 상쾌함을 사랑하는 부류다.


나는 후자에 의견에 동의한다.

불행하게도 언젠가부터 어두운 새벽에 혼자서 잠이 깨는 기이한 병에 걸렸다.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릴 때조차 5시 전엔 어김없이 잠에서 깼다.

머리는 바삭한 쿠키처럼 잠의 가루들이 흩어져 있었고, 짙은 안개가 온몸을 덮고 있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잠의 중력과 사투를 벌이는 기분이다.

질 좋은 숙면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일요일 아침 태양이 신병 훈련소 교관처럼 기상을 외쳐도 끄떡없이 9시까지 잠에 빠져있는 아들의 숙면이 부럽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는 매일 아침 11시까지 잠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규칙적으로 늦잠을 자면서 깊은 사색과 철학적 사고를 발전시켰다고 전해지고,

영국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콜리지는 종종 긴 시간 동안 잠을 자며 꿈속에서 영감을 얻곤 했다.

그의 유명한 시 '쿠불라 칸'은 꿈에서 영감을 받아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숙면은 게으름이 아니며, 오히려 창조적인 사고를 위한 필수 조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잠은 나에게 오래 머물러있지 않는다.

이른 밤에 찾아와선 수배자 마냥 새벽의 어둠 속으로 도망친다.

젠장. 불만 섞인 욕지기가 올라온다.

나이가 들수록 초저녁 잠이 늘고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늙어가고 있다는 것인가?

나의 노화가 수면 패턴을 바꿔놓은 것일까?

물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현대 사회는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으로 가득하다.

그런 불안감은 다양한 신체적 형태로 나타나지만 불면이 가장 흔한 증상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아침은 강렬하고 희망적인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일요일의 깊어가는 오후가 월요일 아침에 출근 준비를 알리는 알람보다 더 끔찍한 것이다.

물론 둘 다 끔찍한 건 사실이다.

일요일 아침 태양이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전,

엄마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이나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산책 길에서 만끽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은근하고 수줍은 햇살이 온몸의 땀구멍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진다.


무심히 흘러가는 나날들 속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 아침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인생에서 몇 번의 아침을 더 맞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에겐 생각보다 많지 않은 아침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산책은 심리치료이고 영혼의 치료약이다.

하루 동안의 일을 정리하는 일기장이 되기도 하며, 별스럽지 않은 생각들을 그려내는 스케치북이 되기도 한다.

산책은 삶을 '무엇'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정의하는 시간이다.

산책은 현재의 내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산책은 내 다리와 정신 사이를 스트레칭해 준다. 육체와 정신 모두를 깨어나게 한다.


우리의 밤은 외부의 힘이 작용하길 기다리며 가만히 멈춰서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침이 필요하다. 아침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외부의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침 자극에 의해 움직이긴 하지만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침대에서 꺼내 세상으로 걸음질 치게 하는 것은 알람이 아니라 하루에 대한 기대이며 희망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나 기대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알람 없이도 기꺼이 침대에서 이불킥을 하고 세상을 향하게 된다. 그런 일이 많을수록 인생은 희망차고 아름다울 것이다. 

물론 대체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아침형 인간이든, 저녁형 인간이든 우리는 현재 우리 삶의 형태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많이 안다는 것이 지혜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는 것이 지혜를 방해하기도 한다.

따라서 온전히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아는 것보다 몸으로 부딪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온전히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루소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눠서 이야기했다.

자기 사랑과 자기 편애라는 개념이다.

자기 사랑은 오로지 자신의 기쁨을 위한 행동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학창 시절 늘 옷을 입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렇다고 맵시 있게 옷을 챙겨 입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자기 사랑이 샤워를 하면서 혼자 노래를 부르며 느끼는 즐거움이라면 자기 편애는 무대 위에서 대중을 위해 부르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70년대 후반의 유행했던 촌스러운 나팔바지를 입거나, 샤워실에서 노래를 더럽게 못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며 타인의 생각이나 시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자기 사랑이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뻐기면서 걷거나, 대중의 박수를 받기 위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 편애다.

자기 편애도 스스로에게 기쁨을 주긴 하지만 타인에 대한 의식과 인위적인 노력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루소는 자기 사랑이 자기 편애보다 더 진실한 기쁨이라고 말한다.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나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산책자는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산책은 루소가 말하는 순수한 자기 사랑이다.

 

신발끈을 동여매고 현관문을 나서는 그 순간, 두 발이 교차하며 움직이면 두뇌는 숨을 쉬고,

사색은 강력한 휘발성 물질처럼 작은 자극에도 불이 붙는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일요일 아침 산책을 사랑한다.

그것이 나에 대한 사랑이라는 믿는다.

누구를 의식하지도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평화와 느긋함을 즐기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지만 여전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다.

나는 저녁형 인간이 좋다. 하지만 오늘도 10시가 되기도 전에 잠자리에 눕는다.

내일 아침의 희망을 맞이하기 위해서 부푼 기대로 잠자리에 드는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 탓이다.

몸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군말 없이 베개에 머리를 누인다.

나라는 아침형 인간은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감사하다.'를 외치며 잡념과 사색의 시스템을 종료시킨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감사하다.'를 외치며 잡념과 사색의 시스템을 종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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