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자루 Aug 23. 2024

#3. 이런 변이 있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눈으로 보기

소로의 눈으로 바라보기

 

산책로에서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나의 산책은 고요한 편이다. 

한 시간 남짓 걷다 서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잔디와 한마디의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물론 잔디도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냄새에 정신이 팔려 나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다. 

그건 내가 잔디와 함께 산책하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서로의 산책을 절대 방해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산책 중에 만나는 가장 불편한 일은 반려견들의 변이다. 

잔디 역시 산책 중에 변을 보는 것을 즐긴다. 

거의 비슷한 장소에 반복적으로 변을 보는 습관이 있지만 가끔 장소를 바꿔가며 변을 보기도 한다. 

항상 배변 봉투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쾌변 후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잔디를 옆에 두고 열심히 변을 치운다. 

우리 동네 산책로에는 반려견의 변을 수거하는 쓰레기통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나는 이 쓰레기통을 완전히 좋아한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고맙다. 

대체로 반려견과 산책하는 견주들은 반려견의 변을 치우는데 자신들의 책임을 다한다. 

그러나 일부 견주들은 길거리에 반려견 변을 두고 변 보듯 하면 그냥 가버린다. 


나에게 있어 여유롭고 유쾌한 산책을 방해는 것은 오로지 반려견들의 변뿐이다. 

시끄러운 오토바이의 행렬이나 강력한 나무뿌리가 보도블록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가끔 넘어질뻔한 경우에도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인도에 주차한 오토바이나 자동차 또는 노상 상점들도 나의 산책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길에 조용히 지뢰처럼 숨어있는 변을 발견할 때마다 나의 주의력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사색의 울타리를 쉽게 벗어난다. 

대신 치워주면 좋으련만 나에겐 솔직히 그렇게 넉넉한 아량이 없다. 

그리고 길에 널린 변을 다 치우기엔 배변 봉투 역시 넉넉하지 않다. 


오늘 나는 뜬금없이 오물을 좋아하는 변태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음에도 변을 자세히 관찰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걸까?

사물을 본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일까? 

본다는 것은 결국 사물에 반사된 빛이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고 뇌는 해석 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사된 빛으로 그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과 뇌에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명백한 실재일까?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기분이나 시선의 각도 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인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머그컵을 본다고 할 때 그것은 온전한 머그컵이 아니다. 

보이는 머그컵의 뒷면이나 아랫면을 우리는 동시에 볼 수없다. 

결국 우리는 머그컵의 일부만을 보면서 그것을 완전한 머그컵이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의 약속인 것이다. 

뭔가 시신경을 통해 뇌에 자극이 전달되었는데 경험상 저렇게 생긴 것은 머그컵이었던 경험이 많다. 

그런 경험들에 비춰 생각하면 저것은 머그컵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뇌의 판단에 합의하고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시민 불복종을 말했던 핸리 데이비드 소로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고 했다. 

소로는 심지어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만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는 소로의 철학과 정확하게 맥을 같이 한다.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고 노래한다. 

보통 과학자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객관적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소로는 보는 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과학적인 시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언가를 관찰한다는 것이 흥미롭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소로의 눈으로 동네 개들의 변을 천천히 그리고 주관적으로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변들은 절대 예뻐 보이거나 사랑스러워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민 불복종처럼 그의 주장에 불복종하기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새로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변에 대한 사색이다.


식전이라면 일단 여기서 멈추고 좀 더 위장이 너그럽게 우리의 상상을 받아 들 일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읽기를 권합니다.


한국어에는 일상에서 겪는 불운이나 재수 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말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똥 밟았다.'는 표현은 단연 압권이다.

'똥 밟았다.'이 얼마나 통렬한 한 마디인가!


우리 삶 속에서 재수 없는 일을 겪었을 때, 짜증 나는 인간을 만났을 때,

짜증을 표출할 수 있는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는 쉽지 않다.


혹시 오늘 똥 같은 상황에 처했거나 똥 같은 인간과 부딪쳤는가?
당황을 넘어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똥부림을 치고 있는가?


그렇다면 마음을 진정시키고 몇 가지 사실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미 일어난 일이나 사건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인생은 늘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똥을 밟은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똥을 밟기 전 과거로 돌아가서 밟는 순간을 피하지 않는 한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모래밭이나 풀밭에 달려가서 지구가 빵구 나거나 신발이 빵구날 때까지 비벼서 떨어내는 것뿐이다.

그렇다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할 일은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활용하여 불평, 불만, 짜증을 섞은 욕지기를 찰지게 내뱉은 후 바로 신발에 매끈하게 매달린 똥을 처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똥을 밟았음에도 처리하지 않고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사람들은 우리가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양갈래로 갈라질 것이다.

분노를 품은 채 서있는 우리 곁으로 어느 누구도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실제의 똥이던 은유적인 똥이던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방법은 동일하다.


일단 억울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삶이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야."라고 속삭이며 우아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분노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발아래로 물컹한 뭔가를 밟는 순간 잠시 후 퍼지는 똥향기에 짜증과 불평이 폭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히스테리에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오히려 똥을 밟았을 때 느끼는 짜증과 불평은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반응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 6장 비극의 정의에서 카타르시스를 감정의 배설로 정의했다.

카타르시스란 한 마디로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관념이나 감정의 표출을 통해 불안과 긴장을 해소함으로써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가 폭발한다면 자연스럽게 폭발하도록 두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스트레스와 불쾌감을 처리하는 본능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분노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다만, 지속적인 분노는 신체와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와 분노는 혈압 상승, 심장 질환, 소화 문제, 면역 체계 약화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비정상적이고 광적으로 분노가 통제되지 않거나 분노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카타르시스를 너무 많이 느낀다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는 것을 추천한다.


다행인 것은 똥을 밟았다고 우리가 똥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노를 계속 품고 있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피폐해지고 결국 똥처럼 더럽혀질 것이다.

똥 같은 환경에 소중한 우리 자신을 유린시킬 필요는 없다.


똥은 피하는 게 정답이다.

그러니 당신을 괴롭히는 상황이나 인간이 있다면 일단 피하자.

라떼 신공을 시전 하려는 꼰대가 있다면 즉시 바쁜 척 서두르며 짐을 싸서 그곳을 벗어나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사회적 관계를 끊어버리자.

그래도 괜찮다.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모든 관계가 반드시 유익한 것은 아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우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자기 보호와 정신 건강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다.

삶은 짧고 소중하다.

불필요한 갈등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괜찮다. 이는 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한 걸음일 뿐이다.


한편,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똥 입장에선 한없이 억울한 것이다.

똥은 그냥 어느 날 그 길가에 놓이게 된 것뿐이다. 어떤 의지를 갖고 그곳에 있었던 게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말했듯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 것이라고 말했다. 똥도 그렇다. 우리와 같은 처지인 것이다. 

물론 약간의 철학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어쨌든 똥은 그저 그 자리에 던져진 것뿐이다.

똥이 우리를 찾아와 자신을 마음껏 짓밟아도 된다고 유혹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 우리가 똥을 밟은 것이다. 똥이 우리를 밟은 게 아니고.


어쩌면 듣기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똥도 나름 존재의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똥을 불쾌하게 여기고 피하려 하지만, 똥은 사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삶의 일부이다.

지금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들이나 환경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전체 인구에 4%가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100명 중 4명이 소시오패스라는 의미다.

그러니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과학적으로 상당히 진실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법칙이라고 부른다.

법칙은 웬만해선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똥을 밟지 않고 길을 걸어 나갈 수 없는 셈이다.

이런 불운은 당신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니다.

이건 법칙이고 인생이란 그렇게 생겨 먹은 구조적 폭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이 모든 환경과 인간은 그저 당연한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자연은 그냥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뜻이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똥을 밟을 준비를 하고 살아가야 한다.

고용 불안정, 임금 착취, 주거 불안 등을 포함한 또라이 상사, 갑질을 사명으로 여기는 고용주나 건물주, 그리고 사차원에서 튀어나온듯한 이해할 수 없는 주변인들.  


자. 지금 당신의 기분이 짜증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가?

맞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똥을 밟은 것이다.

계속 짜증을 내며 똥향기를 맡고 있을 것인가?

재빠르게 지워내고 털어내고 '오늘, 똥 밟았네.'라고 말하며 웃어넘길 것인가?

당신의 선택만이 남았다.

그리고 반성해 보자.
나는 누군가에게 똥이 아니었는지를.
혹은 구타 유발자가 아니었는지를.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며 나는 신천희 시인의 '어머나'라는 시를 읊으며 조용한 미소와 함께 변들에 대한 분노를 떠나보낸다.

 

       어머나
                  - 신천희

할머니 어렸을 땐
똥이 곧 황금이었단다.

호박에 똥을 주고
개도 똥을 먹었단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금 같은 똥.

어디에 쓸까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할머니가
벽에 똥칠을 하고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중에서


이전 02화 #2. 아침형 인간의 비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