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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Aug 26. 2024

#4. 느리게, 더 느리게

카를로 페트리니의 슬로우 푸드

'좋은 산책은 느린 산책이다.' 라고 나는 단언한다.




좋은 산책에 대해 정의를 내리긴 어렵겠지만,

'좋은 산책은 느린 산책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찌민은 결코 느린 도시가 아니다.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달리는 도로, 번화한 시장의 활기찬 소음,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이 도시의 리듬은 마치 빠르게 연주되는 음악처럼 우리를 채근한다. 하지만 이 빠른 리듬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느린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 느림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유동적 근대’로 묘사하며, 우리 삶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유동적 사회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느림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느리다'를 '게으르다'와 동의어라고 배워왔다.

나의 부모님은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어김없이 등짝 스메싱을 날리셨고 게으르면 굶어 죽기 십상이라고 고함을 지르곤 하셨다.

충분히 이해한다.

기원전 2333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전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느리거나 게으르다는 것은 생존지수 제로를 의미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내면의 시간과 공간'에서 느림은 시간을 더 깊이 있게 경험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했다. 즉, 느림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적극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반면, 게으름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이며, 적극적인 참여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상태를 말한다고 했다.

게으르다는 것은 낙심한다는 것이고, 따분해 하는 것이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느린 산책은 희망차고,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찬 세상과 조우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마감이라는 것이 없다면 변도 제대로 누지 못할 정도로 느긋한 편이다.

합격이나 승진, 도전과제 같은 것에도 큰 관심이 없다.

삶을 뒤돌아보니 대체로 그런 목표는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나 강요, 또는 타인을 의식한 자기 강요가 지배적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의 목표는 최대한 느리게 살아가고, 천천히 생각하며, 느긋하게 인생을 누리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는 느긋한 삶을 갈망할 것이다.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기분 좋은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 느린 시간, 러시아워가 끝난 시간에 느긋하게 도로를 달려 출근하여 서너시간 일을 처리한 후 수영이나 운동을 즐기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천천히 저녁 식사를 음미하며 보내는 삶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한다고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우리 같은 소시민이기에 꿈은 꿈으로 접어두고 오늘도 우리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가고 있다.

그러니 허락된 산책 시간만큼은 건달처럼 온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마음껏 느긋해지고 싶다.

매사가 느린 나에게 누군가는 그게 내 인생을 전락시킬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더 깊은 성찰과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느린 산책은 현대 사회의 빠른 속도와 효율성 중심의 삶에 대한 반항이다.

삶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없이 무조건 빠르게만 달려가는 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난치병이다.

현대 사회는 한마디로 너무 빠르고 우리는 느린 것을 참지못한다.

우리는 80년대 늘어진 카세트 테이프처럼 질질 끄는 스토리의 드라마나 영화를 용서하지 못한다.

빙빙 에둘러 말하는 철학이나 에세이나 소설을 견디지 못하고 책장을 덥어버린다.

심지어 유튜브나 틱톡의 쇼컷 영상 한편 조차 10초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거나, 2배속으로 보기 버튼을 누른 후에야 만족감을 느낌다.

우리는 이런 숨가쁜 현실에서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멈춤은 실수나 결함이 아니다. 멈춤은 텅빈 것이 아니고 잠시 유예된 상황일 뿐이다.

생각의 씨앗이 천천히 자연의 시간에 따라 성장하도록 기다리는 인내심과 배려다.

모든 멈춤은 가능성, 특히 인식의 가능성으로 가득차있다.


느린 산책은 또한 자연과의 연결을 통해 우리가 환경과의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는 기회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단지 생산성과 소비로 규정되지 않으며,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는 기회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현대사회가 그러하듯 즉각적으로 쾌락을 소비하고 충족하는, 그리고 재빨리 잊어버리고 또 다른 쾌락을 갈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한채로 말이다.


슬로우 푸드 운동을 주장한 이탈리아의 철학자 카를로 페트리니 음식의 생산, 준비, 소비 과정에서 느림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단지 음식을 천천히 먹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트리니는 느림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보았다. 천천히 음식을 즐기고, 자연과 연결된 삶을 살며,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을 주장했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동의한다고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쥐어짜듯 살면서도 나의 생각과 의지는 페트리니의 생각을 향해있다.

어린왕자가 만난 시간을 파는 상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안녕하세요?" 어린왕자가 말했다.
"안녕?" 상인이 말했다.
그는 갈증을 없애주는 신기한 약을 팔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알만 먹으면 물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사라지는 약이라고 했다.
"아저씨는 왜 이 약을 팔아요?" 어린왕자가 물었다.
"시간절감 효과가 어마어마하단다. 전문가들이 계산을 해보니 이 약을 먹으면 일주일에 53분의 시간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그 53분동안 뭘하죠?"
"자기가 원하는 걸 하는거지."

'나에게 53분이 있다면 천천히 샘이 있는 곳까지 산책하듯 걸어갈거야.'
어린왕자는 생각했다.

그렇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채 그저 바쁘게 움직이는 그런 삶에 길들여 있다.

스스로 부지런하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쫓아 달려가는 경우가 많다.


아브라함 링컨은 말한다. "나는 천천히 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뒤로 가지는 않습니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방향이 틀리지 않는다면 언제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방향이 틀렸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았던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월든'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느리고 간소한 삶을 강조했다.

그의 속내를 잘알수는 없지만 2년간의 자연 속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논쟁에도 불구하고 자연 속에서의 생활을 통해 더 깊은 자기 성찰과 만족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고해도 나는 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모기에게 뜯기며 채소를 경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현대문명과 도시화에 길들여진 나에겐 자연에서의 생존 능력이 없다.

나는 산책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내일 아침이면 다시 고요한 절망의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쌓여있는 일들을 처리할 것이고, 미팅에 참석할 것이고, 신용카드 청구서를 들여다볼 것이다.

소로의 방식은 솔직히 현실성이 없다. 그것이 그의 문제이다.

물론 소로는 우리 모두가 자신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가 자연에서 느린 삶을 추구했던 것은 우리에게 각성제를 제공한 것이지 처방전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 짐을 싸서 소로처럼 숲속이나 월든 호수가로 옮겨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삶의 속도와 방향에 대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할 수는 있다.

그리고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훨씬 느린 세상에서 살았다.

그들이 현대 사회의 속도를 본다면 현기증에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느린 산책은 빠름의 미덕이 아닌 느림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며, 이를 통해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한다.

천천히 걷다 보면, 작은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새들의 지저귐, 발밑에 밟히는 도로의 질감 등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일몰의 아름다움, 꽃의 향기, 주변 사람들의 미소 등 일상 속의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작은 행복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서은국 교수는 그의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보통 로또 같은 커다란 행운이나 행복을 좇는다. 학생일 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아낸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행복은 잠시일뿐 다시 좋은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모든 고통이 끝나고 행복해 질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뿐이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는 결혼과 좋은 집을 사기위해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갚기 위해 수십년을 참아낸다. 그리고 자녀들이 성장하여 부모의 곁을 떠나면 시간적인 여유과 경제적인 여유도 생겨 행복을 누릴 수 있을거라 믿으며 또 이를 악물게 된다. 교회나 절에 가면 나이드신 분들이 많다. 그들은 결국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기 힘드니 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겠다는 심산으로 종교에 몰두한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기만 할뿐 행복은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가치보다는 미래의 큰 행복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방에 날아오는 큰 기쁨보다는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의 빈도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것은 소확행과는 차이가 있다. 소확행이란 단어 속에는 무언가 큰 행복이 있는데 그것을 가질 수 없으니 작은 행복에 만족하겠다는 패배주의적 보상심리가 담겨있다. 우리는 충분히 작은 기쁨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느림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도 적용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내면을 돌볼 시간을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느린 산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은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마음속에 쌓인 걱정과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는 것은 진정한 힐링의 시작이다.


운동을 위해 빨리 걷는 것은 진정한 산책이 아니다. 당장에 도움이 될 그 무엇을 목표로 한다면 걷기의 진정성은 그만큼 빨리 휘발한다.

설혹, 도움이 되지 않아도 스스로 좋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느림만이 우리를 세상의 헤아릴 수 없는 매력 속으로, 무한히 풍부하고 재미있는 자연의 틈새로 이끈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의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이 느린 움직임을 통해 드러난다.


걷기는 때로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성지로 떠나는 순례자를 떠올려보자.

그 누구도 목적지에 빨리 이르기 위해 경쟁을 하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

삼보일배하는 수도자들의 경우도 같다. 발로 걷고 몸을 던지며 참된 것에 다다르기를 갈망한다.

그렇기에 걸음은 우리를 물질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세상으로 부터의 매듭을 풀고 몸을 정화해준다.


잔디는 오늘도 걷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언제든, 어디든 걸음을 멈추고 냄새에 집중한다. 나도 잔디의 멈춤에 함께 동참한다.

느린 산책은 미친듯이 내달리며 폭주하는 삶의 속도에 경쾌한 브레이크를 밟는다.


멈춤은 실수나 결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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